Summary
검색 누락과 자료 제공자의 선별을 감안한 뒤 불확실성을 어떻게 표현해야 법적 증명 판단과 섞이지 않는지를 묻는다. 검색 범위와 남은 누락, 제공자가 고른 자료, 제출하지 않은 문서의 효과를 차례로 살핀다. 점수가 감추는 불확실성, 설명력과 증명 판단의 분리, 미정 사항의 기록을 다룬다.
9.1검색 범위와 남은 누락
남은 진술이 생존한 결과임을 확인한 뒤, 이번에는 무엇이 검색되었고 무엇이 그대로 남았는지를 절차의 문구에 따라 가려야 한다. 증거의 신청과 조사 절차가 그 검색의 출발점이므로, 먼저 민사소송법 제289조가 신청의 요건을 어떻게 두는지부터 읽어야 한다.
민사소송법 제289조는 증거의 신청에 관하여 "①증거를 신청할 때에는 증명할 사실을 표시하여야 한다."고 두고, 이어서 "②증거의 신청과 조사는 변론기일전에도 할 수 있다."고 선다. 앞 문장은 신청이 표시된 사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짐을, 뒷 문장은 조사의 시기가 기일에 묶이지 않음을 뜻한다. 이 규정만으로는 어떤 자료가 실제로 확보되었는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조문에 적힌 두 가지를 함께 놓고 읽어야 한다. 표시된 증명할 사실이 신청의 범위를 이루고, 변론기일전의 조사 가능성은 조사가 미처 다다르지 못한 범위가 남을 수 있음을 함께 보여준다. 이 관점에서 남은 누락은 무엇이 있는지의 문제로 다루어진다.
문서가 그 범위 안에 드는지에 관해서는 민사소송법 제344조가 제출의무의 사유를 나눈다. 동조 제1항은 "①다음 각호의 경우에 문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제출을 거부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1. 당사자가 소송에서 인용한 문서를 가지고 있는 때"와 "2. 신청자가 문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그것을 넘겨 달라고 하거나 보겠다고 요구할 수 있는 사법상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때"를 들고, "3. 문서가 신청자의 이익을 위하여 작성되었거나, 신청자와 문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 사이의 법률관계에 관하여 작성된 것인 때"를 둔다 (민사소송법 제344조). 다만 단서가 붙는데, "다만, 다음 각목의 사유 가운데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하여 "가. 제304조 내지 제306조에 규정된 사항이 적혀있는 문서로서 같은 조문들에 규정된 동의를 받지 아니한 문서", "나. 문서를 가진 사람 또는 그와 제314조 각호 가운데 어느 하나의 관계에 있는 사람에 관하여 같은 조에서 규정된 사항이 적혀 있는 문서", "다. 제315조제1항 각호에 규정된 사항중 어느 하나에 규정된 사항이 적혀 있고 비밀을 지킬 의무가 면제되지 아니한 문서"를 예외로 든다 (민사소송법 제344조). 이 구조는 제출의무가 예외에 막힐 수 있음을 함께 나타낸다.
한편 동조 제2항은 "②제1항의 경우 외에도 문서(공무원 또는 공무원이었던 사람이 그 직무와 관련하여 보관하거나 가지고 있는 문서를 제외한다)가 다음 각호의 어느 하나에도 해당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문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제출을 거부하지 못한다."고 하고, "1. 제1항제3호나목 및 다목에 규정된 문서"와 "2. 오로지 문서를 가진 사람이 이용하기 위한 문서"를 열거한다 (민사소송법 제344조). 여기서도 범위가 열려 있고, 제출이 거부될 사정이 함께 두어져 있다.
이 장면에서 상대측이 제출한 것은 같은 달에 작성된 변경 이메일 세 건, 자금 지급 기록 한 건, 전문가 계산서 하나이고, 세 이메일은 모두 같은 발신 계정에서 나왔다. 앞의 조문들은 이들이 어느 신청의 범위에 담겼는지, 또 어느 제출의무의 사유에 따라 나왔는지를 묻는 틀을 제공한다. 자료가 제출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검색된 범위가 전체 자료와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급 기록의 금액이 이메일 한 건에 기재된 액수와 같고, 계산서가 그 금액을 손해액 계산의 출발값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서로 맞닿는 정황이다. 그렇다고 하여 변경 합의의 성립 시점, 발신 계정의 권한 범위, 지급 기록이 어느 거래에 관한 것인지, 계산서가 쓴 기준 시점과 대안 상황이 확인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항목들은 검색의 범위를 넘어서는 질문으로 남는다.
같은 발신 계정에서 나온 세 이메일을 우리 측은 같은 문안이 반복 발송된 것으로, 상대측은 세 번의 별도 합의로 본다. 이 대립은 제출된 문서의 정리 방식과는 별개로, 조사되어야 할 사실이 무엇인지를 표시하는 문제로 돌아간다. 앞서 본 신청의 요건은 그 표시된 사실의 범위 안에서 자료가 모이는 흐름을 그린다.
결국 이 자리에서 확인되는 것은, 제출된 자료가 검색된 범위를 드러내되 그 범위 밖의 자료가 있는지까지 함께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조문이 두는 제출의무의 사유와 그 예외는, 어느 쪽이든 범위의 경계를 남긴다. 그 경계를 미정의 항목과 함께 둔 채 읽는 것이 이 장면에서 필요한 태도이다.
9.2제공자가 고른 자료
검색의 범위를 나눈 뒤에는 제출된 자료가 당사자가 고른 자료라는 사실에 주의를 돌려야 한다. 상대측이 제출한 자료가 이미 선별된 결과임을 전제로, 제출신청의 허가 여부와 문서제출 거부사유의 판단 기준을 자료에 따라 읽는다.
민사소송법 제347조는 법원이 문서제출신청의 정당한 이유를 판단하는 틀을 정한다. 법원은 문서제출신청에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인정한 때에는 결정으로 문서를 가진 사람에게 그 제출을 명할 수 있고, 제출의 신청이 문서의 일부에 대하여만 이유 있다고 인정한 때에는 그 부분만의 제출을 명하여야 한다(민사소송법 제347조). 한편 법원은 문서가 같은 법 제344조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문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그 문서를 제시하도록 명할 수 있고, 이 경우 법원은 그 문서를 다른 사람이 보도록 하여서는 안된다(민사소송법 제347조). 상대측이 계약 변경을 뒷받침한다는 이메일 세 건과 자금 지급 기록, 전문가 계산서를 내놓은 장면에서, 법원은 제출된 문서의 전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제출의 범위와 필요성을 따로 판단한다.
대법원 2016. 7. 1. 자 2014마2239 결정은 문서제출 거부사유를 다룬다. 그 사안에서 법원은 민사소송법 제344조 제2항에 관해, “문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제344조 제1항에 해당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도 원칙적으로 문서의 제출을 거부하지 못한다고 규정하면서 예외사유로서 ‘오로지 문서를 가진 사람이 이용하기 위한 문서’(이른바 ‘자기이용문서’)를 들고 있다”고 설명한다. 상대측의 이메일과 계산서를 상대측이 자기 이용을 위한 문서로 내세우는 경우에도, 그 문서가 위 예외사유에 드는지는 문서의 표제나 명칭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법원은 “문서의 작성 목적, 기재 내용에 해당하는 정보, 당해 유형·종류의 문서가 일반적으로 갖는 성향, 문서의 소지 경위나 그 밖의 사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객관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고 본다. 같은 논리로, 주관적으로 내부 이용을 주된 목적으로 회사 내부에서 결재를 거쳐 작성된 문서를 자기이용문서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경우를 함께 밝힌다.
위 결정은 거부사유가 인정되지 아니하는 때에도 제출이 반드시 따라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거부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에도 “법원은 민사소송법 제290조에 따라 제출명령신청의 대상이 된 문서가 서증으로서 필요하지 아니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제출명령신청을 받아들이지 아니할 수 있고, 민사소송법 제347조 제1항에 따라 문서제출신청에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인정한 때에 결정으로 문서를 가진 사람에게 제출을 명할 수 있으므로, 문서가 쟁점 판단이나 사실의 증명에 어느 정도로 필요한지, 다른 문서로부터 자료를 얻는 것이 가능한지, 문서 제출로 얻게 될 소송상 이익과 피신청인이 문서를 제출함으로 인하여 받게 될 부담이나 재산적 피해 또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나 법인 내부의 자유로운 의사 형성 및 영업 비밀, 기타 권리에 대한 침해와의 비교형량 및 기타 소송에 나타난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하여 과연 문서제출이 필요한지 및 문서제출신청에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를 판단하여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 세 이메일과 지급 기록, 계산서는 제출되었으나, 그 제출이 필요한지와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는 별도의 판단을 요한다.
그 사안에서 법원은 제출명령신청의 요건을 더 구체화한다. 문서를 가진 사람에게 제출을 명할 것을 신청하는 것은 서증을 신청하는 방식 중의 하나이므로, “법원은 제출명령신청의 대상이 된 문서가 서증으로서 필요하지 아니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제출명령신청을 받아들이지 아니할 수 있다. 또한 문서제출명령의 대상이 된 문서에 의하여 증명하고자 하는 사항이 청구와 직접 관련이 없는 것이라면 받아들이지 아니할 수 있다”고 본다. 지급 기록의 금액이 한 이메일에 적힌 액수와 같고 계산서가 그 금액을 손해액 계산의 출발값으로 삼는 사정만으로, 그 문서들이 쟁점에 필요하다거나 청구와 직접 관련이 있다는 결론이 곧 따라오지는 않는다.
개인정보와 직업의 비밀을 내세운 거부 사유 역시 같은 자료에서 한정해 읽는다. 법원은 개인정보 보호의 사유에 대해 “임직원의 급여 및 상여금 내역 등이 개인정보 보호법상 개인정보에 해당하더라도 이를 이유로 문서소지인이 문서의 제출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정리한다. 직업의 비밀에 대해서는 “‘직업의 비밀’은 그 사항이 공개되면 직업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이후 직업의 수행이 어려운 경우를 가리키는데, 어느 정보가 직업의 비밀에 해당하는 경우에도 문서 소지자는 비밀이 보호가치 있는 비밀일 경우에만 문서의 제출을 거부할 수 있다”고 본다. 이 판단에서 고려할 요소로는 “정보의 내용과 성격, 정보가 공개됨으로써 문서 소지자에게 미치는 불이익의 내용과 정도, 민사사건의 내용과 성격, 민사사건의 증거로 문서를 필요로 하는 정도 또는 대체할 수 있는 증거의 존부 등 제반 사정”이 열려 있다. 결국 제공자가 고른 자료는 그 자체로 전체 자료가 아니며, 제출된 문서의 필요성과 정당한 이유는 위 기준에 따라 따로 확인되어야 한다.
9.3제출하지 않은 문서의 효과
제출된 자료의 선별이 문제이었다면, 이제는 제출되지 않은 문서에 법이 어떤 효과를 두는지를 물어야 한다.
민사소송법 제349조는 명령에 따르지 아니한 때의 효과를 다음과 같이 정한다. "제349조(당사자가 문서를 제출하지 아니한 때의 효과) 당사자가 제347조제1항·제2항 및 제4항의 규정에 의한 명령에 따르지 아니한 때에는 법원은 문서의 기재에 대한 상대방의 주장을 진실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이 조문은 법원에 재량을 부여할 뿐, 상대방의 주장을 자동으로 진실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민사소송법 제350조는 사용을 방해한 때의 효과를 별도로 둔다. "제350조(당사자가 사용을 방해한 때의 효과) 당사자가 상대방의 사용을 방해할 목적으로 제출의무가 있는 문서를 훼손하여 버리거나 이를 사용할 수 없게 한 때에는, 법원은 그 문서의 기재에 대한 상대방의 주장을 진실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이때는 훼손·폐기·불능화의 의도가 요건에 포함된다.
이 사례에서 상대측은 변경 이메일 세 건과 자금 지급 기록, 전문가 계산서를 함께 내밀면서 계약 해지와 손해 배상을 주장한다. 세 이메일의 성격을 두고 우리 츥은 반복 발송, 상대측은 세 번의 별도 합의로 대립하며, 지급 기록이 어느 거래에 관한 것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문제가 되는 문서가 우리 측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면, 법원의 제출 명령에 따르지 않았을 때 제349조가 검토될 자리가 생긴다. 다만 명령 자체가 있었는지, 회신이 지연된 것인지 아닌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발신 계정의 권한 범위, 계산서의 기준 시점과 대안 상황도 역시 미정이다.
두 조문이 정하는 효과는 "진실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그 적용 조건이 다르며, 제출하지 않은 것과 사용을 방해한 것은 구분된다. 제350조를 상대방의 문서 제출 거부에 끌어다 쓰거나, 미정인 사항을 사실로 확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9.4점수가 감추는 불확실성
문서 제출의무를 어긴 자에게 법이 정한 효과를 적용하는 자리와 더불어, 이번에는 증거를 수치 하나로 환산한 판단이 지닌 위험을 묻는다. 민사소송법 제202조는 사실인정의 준거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법원은 변론 전체의 취지와 증거조사의 결과를 참작하여 자유로운 심증으로 사회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하여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라 사실주장이 진실한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이 조문은 판단의 결과가 점수나 확률로 환산된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론 전체의 취지와 증거조사의 결과라는 두 재료를 참작하라는 문구가, 사실인정의 과정이 하나의 수량으로 대체되지 않음을 드러낸다.
형사소송법 제308조는 더 짧게 선언한다. "증거의 증명력은 법관의 자유판단에 의한다." 대법원 2015. 8. 20. 선고 2013도11650 전원합의체 판결은 이 조문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형사소송법 제307조 제1항, 제308조는 증거에 의하여 사실을 인정하되 증거의 증명력은 법관의 자유판단에 의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법관이 증거능력 있는 증거 중 필요한 증거를 채택·사용하고 증거의 실질적인 가치를 평가하여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법관의 자유심증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판시는 증거의 실질적인 가치를 평가하는 일에 수치가 쓰여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가치 평가가 자유심증에 속한다는 말은, 평가의 양태가 정해진 환산 절차에 묶이지 않음을 뜻한다.
그 자유에는 한계가 따른다. 같은 판결이 밝힌 바와 같이, "충분한 증명력이 있는 증거를 합리적인 근거 없이 배척하거나 반대로 객관적인 사실에 명백히 반하는 증거를 아무런 합리적인 근거 없이 채택·사용하는 등으로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 이상, 법관은 자유심증으로 증거를 채택하여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합리적인 근거의 유무가 기준이 될 뿐, 근거를 점수로 옮기는 절차가 요구되지는 않는다. 이 사례에서 우리 측은 세 이메일이 같은 문안의 반복 발송이라고 보고, 상대측은 세 번의 별도 합의라고 본다. 어느 쪽 설명을 채택할지에 관한 판단은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비추어 살피는 일이지, 세 건의 이메일에 각각의 가중치를 배정해 합산한 값으로 결론을 낼 일이 아니다.
한편 같은 판결의 반대의견은 진술이 달라진 경우의 심증 형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순히 추상적인 신빙성의 판단에 그쳐서는 아니 되고, 진술이 달라진 데 관하여 그럴 만한 뚜렷한 사유가 나타나 있지 않다면 위증죄의 부담을 지면서까지 한 법정에서의 자유로운 진술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함이 원칙이다." 이 구절은 무게의 부담이 사유의 유무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지급 기록의 금액이 한 이메일의 기재액수와 같다는 사실 하나에 무게를 몰아 주는 방식은, 그 기록이 어느 거래에 관한 것인지가 미정인 이 사례에서 정당한 근거를 갖추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전문가 계산서가 쓴 기준 시점과 대안 상황 역시 미정이므로, 계산서가 제시한 값을 확정된 손해액으로 놓는 것은 서둘러 판단하는 일에 해당한다. 이 사례에서 수치를 붙인다는 것은 그 수치에 드지 않은 불확실성을 지우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점수 하나는 논리와 경험의 법칙 아래에서의 자유심증을 대신하지 못한다. 변경 합의의 성립 시점과 발신 계정의 권한 범위가 미정인 채로 남아 있는 한, 세 이메일에 일정한 확률을 매겨 놓는 것은 판단의 근거를 닦는 일이 아니라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확정된 것처럼 옮기는 일에 가깝다. 사실 인정은 절차 안에서 드러난 자료의 실질적인 가치를 살피는 결과로 완성되고, 그 결과는 수치의 형태를 띠지 않아도 법이 요구하는 자유심증의 틀 안에 놓인다.
9.5설명력과 증명 판단의 분리
점수로 환산되지 않은 불확실성이 남기는 공백을 마주한 뒤에 남는 질문은, 같은 자료가 내놓는 이야기가 그 자체로 법적 확신을 이루는지 여부이다. 이번에는 자료가 복수의 설명에 얼마만큼 들어맞는지를 가리는 일과, 법원이 요구하는 증명의 정도를 넘겼는지를 판정하는 일이 서로 다른 차원에 놓임을 증명 정도에 관한 판결요지의 문구로 나누어 읽는다.
민사소송에서의 증명 정도를 두고 대법원 2010. 10. 28. 선고 2008다6755 판결은 "민사소송에서 사실의 증명은 추호의 의혹도 있어서는 아니 되는 자연과학적 증명은 아니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경험칙에 비추어 모든 증거를 종합 검토하여 어떠한 사실이 있었다는 점을 시인할 수 있는 고도의 개연성을 증명하는 것이고, 그 판정은 통상인이라면 의심을 품지 않을 정도일 것을 필요로 한다"고 판시했다. 이 판시는 자료가 보여주는 개연성의 높이와 법원이 요구하는 확신의 높이가 같은 척도 위에 있지 않음을 드러낸다. 자료가 여러 설명 가운데 어느 하나에 더 잘 들어맞는다고 해서, 바로 그 설명이 민사상 증명을 마친 것이 되지는 않는다.
같은 판결은 개연성의 의심이 남는 장면에서 그 의심이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이루지 못하는지를 분명히 한다. 대법원 2010. 10. 28. 선고 2008다6755 판결은 "화재가 담뱃불로 발생하였을 상당한 가능성이 있다고 의심되나 이러한 의심만으로는 갑 회사 직원들이 피운 담뱃불로 인한 것이라고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아울러 화재의 원인이 갑 회사 직원들의 과실에 있음을 증명할 책임은 원고에게 있다는 이유로, 화재가 갑 회사 직원들이 피운 담뱃불로 인한 것임을 전제로 하는 원고의 주장을 배척한 원심판단을 수긍한 사례"로 정리했다. 가능성이 있다는 사정은 하나의 설명을 남기지만, 증명 책임이 있는 쪽이 그 설명을 확정하기에 이르지 못하면 법적 판단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형사재판에서는 이 구분이 더욱 선명해진다. 대법원 2011. 4. 28. 선고 2010도14487 판결은 "형사재판에서 범죄사실의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엄격한 증거에 의하여야 하므로, 검사의 입증이 위와 같은 확신을 가지게 하는 정도에 충분히 이르지 못한 경우에는 비록 피고인의 주장이나 변명이 모순되거나 석연치 않은 면이 있는 등 유죄의 의심이 간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하여야 한다"고 밝혔다. 의심이 가는 설명이 남는다는 사실과 유죄의 인정이 도달했다는 사실은 서로 떨어져 있다. 남는 의심은 유죄 쪽이 아니라 피고인 쪽에서 결산된다.
이 판결은 그러한 엄격한 증명이 다루는 범위까지 함께 밝힌다. 대법원 2011. 4. 28. 선고 2010도14487 판결은 "그리고 위와 같은 엄격한 증명의 대상에는 검사가 공소장에 기재한 구체적 범죄사실이 모두 포함되고, 특히 공소사실에 특정된 범죄의 일시는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의 주된 대상이 되므로 엄격한 증명을 통해 그 특정한 대로 범죄사실이 인정되어야 하며, 그러한 증명이 부족한데도 다른 시기에 범행을 하였을 개연성이 있다는 이유로 범죄사실에 대한 증명이 있다고 인정하여서는 아니된다"고 이었다. 시점처럼 구체적으로 특정된 사실에 관한 증명이 비면, 다른 시점일 개연성이 있다는 이야기는 그 자리를 메우지 못한다.
이 구분을 변경 이메일 세 건과 자금 지급 기록, 전문가 계산서가 놓인 장면에 가져오면, 어떤 설명이 더 그럴듯해 보이는지를 따지는 일과 법적 증명에 도달했는지를 묻는 일을 겹쳐 놓아서는 안 된다. 세 건의 이메일이 같은 발신 계정에서 나왔고 지급 기록의 금액이 그중 한 건에 적힌 액수와 같으며 계산서가 그 금액을 출발값으로 삼았다는 사정은, 세 번의 합의라는 설명과 반복 발송이라는 설명 가운데 어느 쪽을 뒷받침할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그 자체로 증명의 정도를 넘겼다는 뜻이 되지 않는다. 이 사례에서 변경 합의의 성립 시점, 발신 계정의 권한 범위, 지급 기록이 어느 거래에 관한 것인지, 계산서가 쓴 기준 시점과 대안 상황은 미정으로 남는다. 민사상 고도의 개연성과 형사상 합리적인 의심의 배제 가운데 어느 기준이 우위에 있는지, 그 고하를 이 자리에서 정하지도 않는다. 설명이 자료에 들어맞는지를 묻는 차원과 증명의 정도를 넘겼는지를 묻는 차원을 나누어 두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9.6미정 사항의 기록
설명력과 증명 판단을 나눈 뒤에 남는 것은 그 판단이 아직 서지 않은 항목들의 목록이다. 이 목록을 어떻게 두느냐가 이 장의 다음 문제이고, 자료의 존재와 법적 평가를 분리해 두는 일이 그 첫걸음이 된다.
형사소송법 제307조는 사실 인정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정한다. 「형사소송법」 제307조(증거재판주의): "①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 ②범죄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 [전문개정 2007. 6. 1.]"(형사소송법 제307조). 이 조문은 사실을 인정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범죄사실에 대해서는 그 증명이 일정한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는 조건을 함께 둔다. 자료가 제출되었다는 사정만으로 사실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 사례에서 상대방이 제출한 자료는 변경 이메일 세 건, 자금 지급 기록 한 건, 전문가 계산서 하나이다. 세 이메일은 모두 같은 발신 계정에서 나왔고, 지급 기록의 금액은 그중 한 이메일에 기재된 액수와 같다. 계산서는 그 금액을 손해액 계산의 출발값으로 삼고 있다. 이 세 가지 자료가 서로 맞물려 있다는 사실은 기록해 둘 만하다. 다만 위 조문에 비추어 보면, 이 연결 관계가 곧 사실 인정에 이르렀다는 뜻은 아니다.
이 사례에서 미정으로 남은 항목은 따로 적어 두어야 한다. 변경 합의의 성립 시점이 언제인지, 발신 계정의 권한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지급 기록이 어느 거래에 관한 것인지, 계산서가 쓴 기준 시점과 대안 상황이 무엇인지가 모두 미정이다. 우리 측은 세 이메일을 같은 문안이 반복 발송된 것으로 보고, 상대측은 세 번의 별도 합의로 본다. 이 두 해석 가운데 어느 쪽이 맞는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이 항목들을 미정으로 두는 까닭은 위 조문이 사실의 인정을 즘거에 의한 일로 한정하고, 범죄사실에는 더 높은 증명 정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확정되지 않은 항목을 임의로 채우면 그 항목은 증거에 의하지 않은 사실이 되고, 그 위에 얹은 계산이나 판단 전체가 흔들린다. 이 사례에서 합성한 사실이 아니라 자료가 확인해 주는 사실만을 따로 적어 두고, 나머지는 미정의 목록으로 남겨 두는 편이 이 조문에 부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