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판단 능력과 자율성의 차이는 역할 분담이나 권리 행사 방식을 조정하는 기준일 뿐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등급화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능력에 따른 제한이 권리 박탈이 아니라 당사자 보호와 참여 지원이라는 조건 위에서 작동할 때에만 헌법상 재판받을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된다.
3.1권리 등급화 배제 원칙
판단 능력과 자율성의 차이를 권리의 보장 수준으로 환산하는 순간, 서열은 비인간 주체에 머물지 않고 인간 사이로 파고든다. 이해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된 사람, 정보를 스스로 처리하기 어려운 사람, 새로운 도구를 쓰지 못하는 사람의 권리가 같은 기준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 편의 중심 명제는 단순하다. 능력은 역할과 권리 행사 방식을 정하는 기준일 수는 있으나, 인간의 기본적 권리 자체를 등급화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물음이 해결되지 않으면 사법의 접근과 보호가 능력 있는 자에게 쏠리고, 판사를 설득할 수단이 많은 쪽이 권리를 더 갖는 질서가 굳어진다.
3.2실질적 접근과 보완 수단
「대한민국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한다. 이 보장 앞에서 능력에 따른 접근의 차별이 정당화되는지, 아니면 보완 수단으로 메워야 할 불평등인지를 따로 물어야 한다. 형식적으로는 같은 문이 열려 있어도 자료를 읽고 이해하며 반론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능력이 실제로는 다르다면, 형식적 평등만으로 이 조항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 편에서 능력의 차이는 보호를 위한 적응의 대상이지 권리 축소의 근거가 아니다. AI가 설명의 문턱을 낮추고 법률 지원을 저렴하게 하여 이 격차를 줄일 수 있다는 희망도 같은 자리에 있다. 그 이익은 지원이 더 필요한 사람에게도 닿도록 설계될 때, 능력의 차이가 권리 보장의 차이로 이어지지 않게 막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3.3반론: 행위능력과 우선순위
가장 강한 반론은 행위능력 제도다. 능력에 따라 권리 행사를 조정하는 제도도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이다. 구체적인 현행법의 범위와 효과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남긴다. 이 반론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다만 그 제한이 당사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일 뿐, 권리를 박탈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 위에 설계되어야 한다. 그 전제가 실제로 지켜지는지, 제한이 회복과 참여를 돕는 방향으로 작동하는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 현행 당사자능력과 소송능력의 요건에 관한 해설은 III-02가 다루므로 이 편에서는 되풀이하지 않는다. 한정된 자원의 우선순위를 능력의 서열로 정해야 한다는 반론에 대해서도, 우선순위는 피해의 중대성, 회복 가능성, 구제의 시급성 같은 기준으로 정할 수 있다. 뛰어난 자를 먼저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시급하고 되돌리기 어려운 손실을 먼저 구제하는 기준은, 능력에 따른 권리의 서열화와 구별된다.
3.4명제를 버릴 조건과 경계
이 명제를 버리려면 능력에 따른 권리 자체의 차등이 보호에 필수적이며, 동등한 권리 아래의 지원·행사 조정으로는 같은 보호가 불가능하다는 근거가 필요하다. 그전까지 권한 배분에는 능력을 고려하되, 인간의 기본적 권리 유무에는 이를 적용하지 않는다. AI가 인간보다 뛰어난 추론을 수행하더라도 인간의 권리가 그 사실로 줄어들지 않으며, 반대로 인간이 어느 체계보다 못하다는 이유로 재판받을 권리를 잃지도 않는다. 사법의 미래는 인간이 초지능보다 더 많이 안다는 전제 없이도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 총서의 가설이, 이 편에서는 권리의 분배 앞에 놓이는 셈이다. 능력의 관측은 제도의 역할을 나누는 데 쓰되, 권리를 나누는 데는 쓰지 않는 선이 이 편의 경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