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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설계도: 사실·쟁점·입증책임의 통합 재구성 · II-01 · 제8장 · 초판

입증 실패의 해석 한계와 파급 범위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어디까지 해석할 수 있으며, 입증 실패의 효과는 어느 주장에까지 미치는가?

분량
약 3,100단어 · 13분
자료
조문 5 · 판결 3
기준일
2026-10-11
이 장의 목차
  1. 요약
  2. 8.1입증 실패의 판정 기준
  3. 8.2조사된 증거로 한정된 인정
  4. 8.3처분권이 가른 심리의 범위
  5. 8.4석명과 직권심리의 자리
  6. 8.5제출되지 않은 자료의 효과
  7. 8.6입증 실패가 미치는 범위
  8. 다룬 법령
  9. 다룬 판결

합성 사례 이 장의 당사자와 사실관계는 이 권의 합성 사례에서 왔습니다. 실제 사건이 아닙니다.

요약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어디까지 해석할 수 있으며 입증 실패의 효과가 어느 주장에까지 미치는지를 묻는다. 입증 실패의 판정 기준, 조사된 증거로 한정된 인정, 처분권이 가른 심리의 범위, 석명과 직권심리의 자리, 제출되지 않은 자료의 효과, 입증 실패가 미치는 범위를 차례로 살핀다.

8.1입증 실패의 판정 기준

앞 단위가 쟁점별 입증 책임의 배분을 미정 쟁점에 나누어 설정한 데서 멈춘 터에, 이제 그 책임을 지은 쪽이 내놓은 자료가 법정에서 얼마만큼 받아들여지는지가 문제로 남는다. 이 장면에서 상대방은 계약서와 변경 이메일, 자금 기록과 전문가 계산서를 한꺼번에 제시하지만, 문서가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사실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의 인정은 증명의 정도에 달려 있고, 그 정도를 정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부터 읽어야 한다.

민사소송에서 필요한 사실의 증명의 정도에 관하여 대법원 2010. 10. 28. 선고 2008다6755 판결은 "민사소송에서 사실의 증명은 추호의 의혹도 있어서는 아니 되는 자연과학적 증명은 아니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경험칙에 비추어 모든 증거를 종합 검토하여 어떠한 사실이 있었다는 점을 시인할 수 있는 고도의 개연성을 증명하는 것이고, 그 판정은 통상인이라면 의심을 품지 않을 정도일 것을 필요로 한다"고 선언한다. 이 판정 기준은 두 가지 층위로 읽힌다. 자연과학적 확실함까지 요구하지 않으므로 의심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증명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며, 다만 의심이 남는 채로 판단해서는 안 되고 고도의 개연성이 요구된다. 이 사례에서 계약서 버전의 진정성, 변경 합의의 권한, 손해액 산정의 기준 시점이 각각 다투어질 때, 위 기준은 쟁점마다 따로 적용된다. 한 문서의 진정성이 어느 정도로 뒷받침되었다는 사실이 다른 문서의 진정성까지 끌어올리지 않으며, 손해액 계산이 정교하다는 사정이 계약의 버전을 확정하는 근거가 되지도 않는 까닭이다.

위 판결은 상당한 가능성을 가지고 의심된다는 상태가 증명에 이르지 못한 사례를 함께 보여준다. 같은 판결에서 대법원은 "화재가 담뱃불로 발생하였을 상당한 가능성이 있다고 의심되나 이러한 의심만으로는 갑 회사 직원들이 피운 담뱃불로 인한 것이라고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아울러 화재의 원인이 갑 회사 직원들의 과실에 있음을 증명할 책임은 원고에게 있다는 이유로, 화재가 갑 회사 직원들이 피운 담뱃불로 인한 것임을 전제로 하는 원고의 주장을 배척한 원심판단을 수긍한 사례"(대법원 2010. 10. 28. 선고 2008다6755 판결)로 판시한다. 여기서 상대방이 제시한 자료가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가리킬 뿐이라면, 그 가능성은 충분한 증명이 아니다. 상대방이 손해의 발생을 설명하는 계산서를 내놓았다고 하여도, 계산의 전제가 되는 기준 시점이 미정이라면 그 계산서만으로 손해액이 확정되지는 않는다. 자료가 모여 있다는 사실이 법적 평가가 아니라는 점이 이 판시에서 분명해진다.

증거의 평가가 법관에게 넓게 맡겨져 있다고 하여도, 그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 이 한계는 형사소송법 제308조의 자유심증주의를 다룬 대법원 2015. 8. 20. 선고 2013도11650 전원합의체 판결의 다수의견이 읽는 방식이다. 위 판결의 다수의견은 "형사소송법 제307조 제1항, 제308조는 증거에 의하여 사실을 인정하되 증거의 증명력은 법관의 자유판단에 의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법관이 증거능력 있는 증거 중 필요한 증거를 채택·사용하고 증거의 실질적인 가치를 평가하여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법관의 자유심증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대법원 2015. 8. 20. 선고 2013도11650 전원합의체 판결)고 밝히고, 이어서 "충분한 증명력이 있는 증거를 합리적인 근거 없이 배척하거나 반대로 객관적인 사실에 명백히 반하는 증거를 아무런 합리적인 근거 없이 채택·사용하는 등으로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 이상, 법관은 자유심증으로 증거를 채택하여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대법원 2015. 8. 20. 선고 2013도11650 전원합의체 판결)고 기준을 제시한다. 자유심증주의가 넓은 심증 형성의 여지를 남긴다고 해도, 이 여지가 논리와 경험의 법칙을 벗어난 판단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이 사례에 적용하면, 사건 뒤 작성된 설명 문서가 당시의 의사결정을 해석해 같은 일에 다른 표현을 쓰고 있다 하더라도, 당사자가 내놓은 문서의 평가가 경험칙에 어긋나지 않아야 하고 합리적인 근거 없는 배척이나 채택은 허용되지 않는다.

위 판결의 반대의견은 증거 수집과 신빙성 판단의 한계를 보다 엄격히 읽는다. 같은 판결의 반대의견은 "수사기관이 피고인 아닌 사람을 상대로 증거를 수집하면서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정한 절차에 따르지 아니하여 증거능력이 부정되는 정도에까지는 이르지 아니하였더라도, 피고인 아닌 사람을 소환하여 진술을 듣고 이를 조서로 작성하는 일련의 증거수집과정이 수사의 정형적 형태를 벗어남으로써 실체적 진실 규명과 기본적 인권 보장을 목표로 하는 형사사법절차의 존재 의의와 목적에 비추어 수사의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고 그 과정에 허위가 개입될 여지가 있을 경우에는, 진술조서의 진술기재의 신빙성을 인정하려면 그것을 뒷받침할 객관적인 증거나 정황사실이 존재한다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야 한다"(대법원 2015. 8. 20. 선고 2013도11650 전원합의체 판결)고 본다. 나아가 같은 반대의견은 "공판중심주의 원칙과 전문법칙의 취지에 비추어 보면, 피고인 아닌 사람이 공판기일에 선서를 하고 증언하면서 수사기관에서 한 진술과 다른 진술을 하는 경우에, 공개된 법정에서 교호신문을 거치고 위증죄의 부담을 지면서 이루어진 자유로운 진술의 신빙성을 부정하고 수사기관에서 한 진술을 증거로 삼으려면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인 자료가 있어야 한다"(대법원 2015. 8. 20. 선고 2013도11650 전원합의체 판결)고 덧붙이고, "이때 단순히 추상적인 신빙성의 판단에 그쳐서는 아니 되고, 진술이 달라진 데 관하여 그럴 만한 뚜렷한 사유가 나타나 있지 않다면 위증죄의 부담을 지면서까지 한 법정에서의 자유로운 진술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함이 원칙"(대법원 2015. 8. 20. 선고 2013도11650 전원합의체 판결)이라고 밝힌다. 이 반대의견의 기준은 민사소송에 그대로 옮겨지지 않으나, 같은 사안에 대해 민사로 제출한 설명과 기관에 낸 설명이 함께 남아 있는 이 사례에서, 두 설명이 어긋나는 경우 어느 쪽에 무게를 둘 것인지 판단할 때 참고할 문제를 짚어준다.

결국 입증이 실패했다는 판정은 자료가 없다는 말과 같지 않다. 자료가 있다 하더라도 고도의 개연성이라는 증명의 정도에 이르지 못하면 그 사실은 인정되지 않고, 자유심증주의가 그러한 부정을 막지도 못한다. 적용되는 계약의 버전, 변경 합의에 관한 권한, 손해액 계산의 기준 시점이 미정으로 남아 있는 동안에는, 어느 쟁점에 대해서도 증명이 실패하였는지가 확정되지 않는다. 위 판례가 정한 기준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정 기준을 세울 이유는 없다.

8.2조사된 증거로 한정된 인정

입증 실패의 판정이 무엇을 기준으로 내려졌는지를 확인한 뒤, 그 판정의 근거가 되는 사실의 범위가 어디까지로 묶이는지가 문제로 남는다. 상대방은 계약서 여러 버전과 변경 이메일, 자금 기록, 전문가 계산서를 한꺼번에 내놓았다. 그러나 문서의 작성 시점이 서로 다르고, 목록에 이름이 있는 메시지와 원자료 가운데 파일이 없는 것이 있다. 같은 일에 대한 설명이 민사 제출물과 기관 제출물에 각각 남아 있으며, 사건 뒤에 작성된 설명 문서가 당시 의사결정을 해석해 다른 표현을 쓰고 있다. 이 장면에서 법원이 무엇을 근거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지가 이 글의 질문이다.

민사소송법 제289조(증거의 신청과 조사)는 증거의 신청과 조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한다. "①증거를 신청할 때에는 증명할 사실을 표시하여야 한다. ②증거의 신청과 조사는 변론기일전에도 할 수 있다." (민사소송법 제289조) 이 조문은 증거의 신청 단계에서 증명할 사실의 표시를 요구하고, 조사의 시기만을 변론기일 전으로 넓힌다. 따라서 신청된 증거에 대해 실제로 조사가 이루어졌는지, 그 조사가 어떤 사실의 증명을 위한 것이었는지가 여기서 드러난다. 이 사례에서 파일이 존재하지 않는 메시지와 원자료는 신청의 목록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하더라도 조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목록에 이름이 있는 일과 조사가 이루어진 일은 구별되어야 한다.

사실의 인정이 무엇을 통해서만 가능한지에 관한 기준은 형사소송법 제307조(증거재판주의)에 명시되어 있다. "①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 ②범죄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 [전문개정 2007. 6. 1.]" (형사소송법 제307조) 이 조문의 제1항은 사실의 인정이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선언하고, 제2항은 범죄사실에 요구되는 증명의 정도를 별도로 정한다. 민사소송에 관한 이 사례에서 적용되는 증명의 정도는 앞서 살핀 기준을 따른다. 다만 사실의 인정이 조사된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는 구조 자체는 이 사례에서 달라지지 않는다. 조사되지 않은 문서의 목록상 존재가 사실 인정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이 이 조항이 이 사례에 주는 뜻이다.

여기서 자료가 모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법적 평가와 같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계약서 버전과 이메일, 자금 기록, 계산서가 함께 제출되었다는 사정은 증거가 제출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어느 버전의 계약서가 적용되는지, 변경 합의에 권한이 누구에게 있었는지, 손해액의 계산 기준 시점이 언제인지는 이 사례에서 정해지지 않았다. 미정으로 남은 쟁점은 미정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 사건 뒤에 작성된 설명 문서가 당시 의사결정을 해석해 같은 일에 다른 표현을 쓰고 있다면, 그 문서는 조사된 자료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사건 당시의 사실을 대신 인정해 주지 않는다.

같은 상대방에 대해 민사로 낸 설명과 기관에 낸 설명이 함께 제출된 경우에도 앞의 구조는 그대로 적용된다. 두 설명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 자체가 어느 쪽 설명을 배척하거나 채택하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어떤 설명이 사실인정의 근거가 될지는 조사된 증거 안에서 판단될 일이다. 나아가 자료에 나타나지 않은 사정을 추측으로 채우는 일은 사실의 인정이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는 요구에 어긋난다.

결국 이 사례에서 사실인정의 근거는 실제로 조사된 증거로 한정된다. 신청 목록에만 있고 파일이 없는 자료는 그 한정 밖에 남는다. 조사된 증거 안에서 확인되지 않는 쟁점은 미정의 상태로 둔다. 증거가 없다는 사실 자체를 다른 사실의 증거로 확대해 읽는 것은 이 한정을 넘어서는 일이다.

8.3처분권이 가른 심리의 범위

조사된 증거로 인정할 사실이 한정된다고 해도, 법원이 무엇을 심리할 것인지는 별도의 문제로 남는다. 민사소송법 제203조는 처분권주의를 두어 "법원은 당사자가 신청하지 아니한 사항에 대하여는 판결하지 못한다"라고 정하고 있다. 이 조문은 법원이 직권으로 심리할 수 있는 대상의 밖을 금지하는 선이지, 당사자가 신청한 사항 안에서 무엇까지 심리할지까지 정하지는 않는다.

그 선이 구체적으로 그어지는 모습은 대법원 2016. 11. 4. 자 2015마4027 결정에서 확인된다. 이 결정은 소송허가절차의 성격을 먼저 밝힌 뒤 심리할 대상을 가른다. 결정은 "증권관련 집단소송법은 ‘제2장 소의 제기 및 허가 절차’에 관한 부분에서 증권관련 집단소송의 허가요건을 별도로 정하고(제11조, 제12조), 대표당사자가 소송허가 신청의 이유를 소명하도록 하며(제13조 제1항), 소송허가요건에 적합한 경우에만 결정으로 증권관련 집단소송을 허가하도록 하는(제15조 제1항) 등 소송허가결정이 확정되어야 비로소 본안소송절차를 진행할 수 있도록 규정함으로써, 증권관련 집단소송이 집단소송이라는 특수한 절차로 진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절차인 소송허가절차와 집단소송의 본안소송절차를 분리하고 있다"고 설시한다(대법원 2016. 7. 1. 자 2014마2239 결정). 절차의 성격에 따라 심리할 대상이 정해진다는 점이 이 설시의 요체이다.

같은 결정은 그 구분을 심리 대상의 배분으로 이어간다. 결정은 "따라서 소송허가절차에서 대표당사자가 소명할 대상은 소송허가요건이고, 본안소송절차에서 다루어질 손해배상책임의 성립 여부 등은 원칙적으로 소송허가절차에서 심리할 대상이 아니다. 다만 법원은 증권관련 집단소송법 제12조 제1항 제2호에 정한 ‘제3조 제1항 각 호의 손해배상청구로서 법률상 또는 사실상의 중요한 쟁점이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될 것’이라는 소송허가요건이 충족되는지를 판단하는 데에 필요한 한도 내에서 손해배상청구의 원인이 되는 행위 등에 대하여 심리를 할 수 있다"고 밝힌다(대법원 2016. 7. 1. 자 2014마2239 결정). 여기에 두 겹의 한정이 있다. 심리는 소송허가요건의 판단이라는 좁은 목표에 묶이고, 그 목표 안에서도 필요한 한도에서만 본안의 사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 구조를 합성 사례에 놓아보면, 상대방이 계약 해지와 경제적 손해를 함께 내걸고 계약서의 여러 버전과 변경 이메일, 자금 기록, 전문가 계산서를 한꺼번에 제출한 장면도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 제출물이 쟁점의 목록을 넓히는 효과를 자동으로 갖지는 않는다. 첫째, 처분권주의는 법원이 당사자가 신청하지 아니한 사항에 대해 판결하지 못하게 하므로(민사소송법 제203조), 신청의 바깥에 놓인 사항은 심리의 대상이 되지도 않고 판결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둘째, 결정이 정한 심리의 한도는 절차의 성격에서 나오므로(대법원 2016. 7. 1. 자 2014마2239 결정), 같은 제출물이라도 어느 단계에서 무엇을 판단하기 위해 쓰이는지에 따라 다루는 범위가 달라진다. 셋째, 필요한 한도에서만 심리한다는 문구는(대법원 2016. 7. 1. 자 2014마2239 결정) 필요한 범위 밖의 사정까지 끌어와 판단 근거로 삼지 않음을 뜻한다.

따라서 상대방이 쟁점을 넓게 제시했다는 사실만으로 법원이 그 전부를 심리 대상으로 삼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무엇이 신청된 사항인지, 어느 절차에서 무엇을 판단할 차례인지, 그 판단에 필요한 한도가 어디까지인지가 함께 정해져야 심리의 범위가 선다. 판결할 수 없는 사항은 심리의 밖에 있고, 심리할 필요가 없는 사정은 한도의 밖에 있다. 처분권이 가르는 것은 그 두 경계이다.

8.4석명과 직권심리의 자리

증거의 평가와 쟁점의 정리에 관한 논의를 지나면, 법원이 스스로 묻고 조사하는 권한이 어디에서 오며 어느 범위에 미치는지가 다음 쟁점으로 남는다. 이 쟁점을 다루기 위하여 먼저 민사소송법상 석명과 구문의 근거를 확인한다. 민사소송법 제136조는 석명권과 구문권에 관하여 "①재판장은 소송관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당사자에게 사실상 또는 법률상 사항에 대하여 질문할 수 있고, 증명을 하도록 촉구할 수 있다. ②합의부원은 재판장에게 알리고 제1항의 행위를 할 수 있다. ③당사자는 필요한 경우 재판장에게 상대방에 대하여 설명을 요구하여 줄 것을 요청할 수 있다. ④법원은 당사자가 간과하였음이 분명하다고 인정되는 법률상 사항에 관하여 당사자에게 의견을 진술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민사소송법 제136조)라고 규정한다. 이 조항은 재판장이 질문하고 증명을 촉구할 수 있음을 정하면서, 동시에 당사자가 상대방의 설명을 요구해 줄 것을 요청할 수 있는 경로도 함께 열어 둔다. 이 사례에서 상대방이 계약서의 여러 버전과 변경 이메일, 자금 기록, 전문가 계산서를 한꺼번에 제출한 장면에 대해서는, 재판장이 각 문서의 작성 시점과 서로 다른 표현의 관계를 묻고 그 차이를 밝힐 수 있는 근거가 이 조항에 있다. 다만 조항이 허용하는 것은 질문과 증명의 촉구이므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곧 정해진 사실로 굳는다고 이 조항에서 읽을 수는 없다.

법원이 묻는 권한 가운데 법률상 사항을 놓친 경우의 절차는 같은 조항의 틀 안에서 정해진다. 민사소송법 제136조 제4항은 "법원은 당사자가 간과하였음이 분명하다고 인정되는 법률상 사항에 관하여 당사자에게 의견을 진술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고 하여, 간과가 분명한 법률상 사항에 한하여 의견 진술 기회를 줄 것을 정한다. 이 문장에 담긴 조건은 '간과하였음이 분명하다고 인정되는' 법률상 사항이라는 점이므로, 이 사례에서 적용되는 계약의 버전과 변경 합의의 권한 귀속이 미정으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도, 법원이 어떤 법률상 사항이 간과된 것인지를 먼저 특정한 뒤에 의견 진술 기회를 주는 흐름이 이 조항의 자리다. 이와 같은 민사소송법의 규정은 민사소송의 심리를 전제로 한 것이므로, 그 규정을 다른 종류의 소송에 그대로 옮겨 적용할 수 있는지는 별도로 살펴야 한다.

행정소송에서 법원이 직권으로 심리하는 근거는 별도의 조문에 있다. 행정소송법 제26조는 직권심리에 관하여 "법원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직권으로 증거조사를 할 수 있고, 당사자가 주장하지 아니한 사실에 대하여도 판단할 수 있다." 고 규정한다. 이 조항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 직권으로 증거조사를 할 수 있고, 아울러 당사자가 주장하지 않은 사실에 관하여도 판단할 수 있음을 함께 정하고 있다. 민사소송법 제136조가 질문과 증명 촉구, 그리고 간과된 법률상 사항에 관한 의견 진술 기회에 방점을 두는 것과 달리, 이 조항은 증거조사와 판단의 대상 자체를 넓힐 수 있음을 선언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같은 상대방에 대해 민사로 제출한 설명과 기관에 낸 설명이 함께 남아 있는 이 사례에서, 어느 절차의 규정이 적용되는지에 따라 법원이 다룰 수 있는 사실의 범위가 달라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두 조문을 나란히 놓고 보면, 법원이 묻는 권한과 법원이 심리하는 권한의 근거가 각각 다르게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사소송법 제136조는 소송관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한 질문과 증명 촉구를 정하고, 행정소송법 제26조는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의 직권 증거조사와 주장되지 않은 사실에 대한 판단을 정한다. 한쪽 조문에 다른 쪽 조문의 효과를 끌어와, 민사소송에서 당사자가 주장하지 않은 사실을 법원이 판단할 수 있다고 단정하거나, 행정소송에서 법률상 사항의 간과에 관한 의견 진술 기회만으로 심리의 범위가 정해진다고 보는 것은 두 조문이 놓인 자리를 섞는 해석이 된다. 이 사례에서 사건 뒤 작성된 설명 문서가 당시 의사결정을 해석해 같은 일에 대해 다른 표현을 쓰고 있는 장면에 대해서도, 어느 소송의 조항이 적용되는지에 따라 법원이 취할 수 있는 조치가 무엇인지가 갈린다.

결국 석명과 직권심리는 각각의 조문이 정한 범위 안에서만 그 자리를 갖는다. 민사소송법 제136조는 질문, 증명 촉구, 상대방에 대한 설명 요구의 요청, 그리고 간과된 법률상 사항에 관한 의견 진술 기회를 절차의 수단으로 정하고 있을 뿐이며, 그 수단을 써서 확보되는 것은 분명해진 소송관계이지 미정인 사항의 확정이 아니다. 행정소송법 제26조는 직권 증거조사와 판단 대상의 확대를 허용하지만, 그 허용이 민사소송의 심리 범위에 관한 규칙까지 바꾸는 것은 아니다. 적용되는 계약의 버전, 변경 합의에 관한 권한의 귀속, 손해액 계산의 기준 시점이 미정으로 남아 있는 이 사례에서 법원이 물을 수 있는 것과 심리할 수 있는 것은 각 조문의 문언이 정한 자리에 머무르며, 자료가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범위가 넓어지지 않는다.

8.5제출되지 않은 자료의 효과

문제를 나누고 심리의 자리를 가린 뒤에도 상대방은 문서를 내놓지 않고 있다. 이때 미제출 자체로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문서의 제출의무와 그 거부의 요건을 둔 규정에서 먼저 확인한다. 민사소송법 제344조는 문서를 가진 사람이 제출을 거부하지 못하는 경우를 열거하면서, 제1항제3호에 단서를 두어 "다음 각목의 사유 가운데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한정한다. 이 단서는 제출의무의 예외를 둔 것이므로, 제출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를 예외로 삼을 자리는 아니다.

다음으로 거부를 정당화하는 예외사유가 무엇인지를 대법원 2016. 7. 1. 자 2014마2239 결정에서 확인한다. 그 결정은 제344조 제2항 제2호의 자기이용문서에 대하여 "어느 문서가 오로지 문서를 가진 사람이 이용할 목적으로 작성되고 외부자에게 개시하는 것이 예정되어 있지 않으며 개시할 경우 문서를 가진 사람에게 심각한 불이익이 생길 염려가 있다면, 문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위 규정의 자기이용문서에 해당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면서도 "설령 주관적으로 내부 이용을 주된 목적으로 회사 내부에서 결재를 거쳐 작성된 문서일지라도 … 내부문서라는 이유로 자기이용문서라고 쉽게 단정할 것은 아니다"라고 밝힌다. 이 사안에서 몇몇 문서는 작성 시점과 작성 주체가 서로 다르고, 일부는 사건 뒤에 작성된 설명이므로, 어느 문서가 위 예외에 드는지는 여기서 정해지지 않는다.

거부사유가 인정되지 않는 경우에도 제출이 곧바로 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같은 결정은 "문서가 쟁점 판단이나 사실의 증명에 어느 정도로 필요한지, 다른 문서로부터 자료를 얻는 것이 가능한지, 문서 제출로 얻게 될 소송상 이익과 피신청인이 문서를 제출함으로 인하여 받게 될 부담이나 재산적 피해 또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나 법인 내부의 자유로운 의사 형성 및 영업 비밀, 기타 권리에 대한 침해와의 비교형량 및 기타 소송에 나타난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하여 과연 문서제출이 필요한지 및 문서제출신청에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를 판단하여야 한다"고 기준을 제시한다. 변경 합의에 관한 이메일이나 전문가 계산서의 원자료가 어느 정도로 필요한지, 목록에 이름만 있는 문서를 대체할 자료가 있는지는 이 사안에서 미정으로 남는다.

한편 당사자가 사용을 막아 자료를 없앤 경우에는 별도의 효과가 있다. 민사소송법 제350조는 "당사자가 상대방의 사용을 방해할 목적으로 제출의무가 있는 문서를 훼손하여 버리거나 이를 사용할 수 없게 한 때에는, 법원은 그 문서의 기재에 대한 상대방의 주장을 진실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정한다. 다만 이는 사용 방해와 훼손이라는 요건이 갖추어진 경우의 얘기이다. 이 사안에서 파일이 없다는 사정만으로 위 요건이 채워지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출되지 않은 자료에 관하여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좁다. 제출의무가 있는 문서의 거부사유가 무엇인지, 거부 이후 제출명령이 내려지는 요건이 무엇인지는 정해져 있다. 그러나 미제출이 곧 상대방이 증명하려는 사실 전체를 진실로 만드는 것은 아니며, 거부사유나 정당한 이유에 관한 새로운 기준을 새로 만들어낼 수도 없다. 적용 계약의 버전과 손해액 산정의 기준 시점이 미정인 채로 남아 있는 이 사안에서, 자료가 모여 있지 않은 사실 자체를 법적 평가로 읽어내는 것은 앞선 해석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8.6입증 실패가 미치는 범위

제출되지 않은 자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범위를 가린 뒤에는, 한 쟁점에서 입증이 실패한 경우 그 효과가 어디까지 미치는지가 남는다. 상대방은 여러 문서를 내놓으면서 계약 해지와 손해를 함께 주장하지만, 각 문서가 무엇을 보여주는지와 그것이 법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서로 다른 문제이다. 이 점에서는 다른 민사소송의 확정판결을 둘러싼 판단이 기준을 제공한다.

대법원 2019. 8. 9. 선고 2019다222140 판결은 판시사항 [1]에서 먼저 확정판결의 존재와 그 이유를 이루는 사실관계를 구별한다. 그 판결은 "[1] 피고와 제3자 사이에 있었던 민사소송의 확정판결의 존재를 넘어서 판결의 이유를 구성하는 사실관계들까지 법원에 현저한 사실로 볼 수 있는지 여부(소극)"라고 판시사항을 적었다. 확정판결이라는 외형적 사실은 달라도, 그 판결의 이유 안에 적힌 사실관계까지 법원에 현저한 사실로 끌어들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 사례에서 상대방이 내놓은 계약 관련 문서가 무엇을 인정하게 하는지와 별개로, 다른 자리에서 내려진 판단의 내용 자체를 현저한 사실로 삼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같은 판결은 확정된 관련 민사사건의 판결에서 인정된 사실이 지닌 증거로서의 힘도 함께 밝힌다. 대법원 2019. 8. 9. 선고 2019다222140 판결의 판결요지 [1]에 따르면, "민사재판에 있어서 이미 확정된 관련 민사사건의 판결에서 인정된 사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유력한 증거가 되지만, 당해 민사재판에서 제출된 다른 증거 내용에 비추어 확정된 관련 민사사건 판결의 사실인정을 그대로 채용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합리적인 이유를 설시하여 이를 배척할 수 있다는 법리도 그와 같이 확정된 민사판결 이유 중의 사실관계가 현저한 사실에 해당하지 않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확정된 판결의 인정 사실은 유력한 증거일 뿐이고, 다른 증거에 비추어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에는 이유를 밝혀 배척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사례에서 상대방이 제시한 문서들이 서로 다른 시점에 작성되었다는 점만으로 어느 문서의 사실인정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정해져 있지 않다.

대법원 2019. 8. 9. 선고 2019다222140 판결은 판시사항 [2]에서 위 법리가 어떤 절차에서 어긋났는지를 구체화한다. 그 판시사항은 "[2] 원심이 다른 하급심판결의 이유 중 일부 사실관계에 관한 인정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위 사정들이 ‘이 법원에 현저한 사실’이라고 본 사안에서, 당해 재판의 제1심 및 원심에서 다른 하급심판결의 판결문 등이 증거로 제출된 적이 없고, 당사자들도 이에 관하여 주장한 바가 없음에도 이를 ‘법원에 현저한 사실’로 본 원심판단에 법리오해의 잘못이 있다고 한 사례"라고 적었다. 증거로 제출되지도 않았고 당사자가 주장하지도 않은 사정을 법원에 현저한 사실로 취급한 데 잘못이 있다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사건 뒤 작성된 설명 문서가 당시 의사결정을 해석해 같은 일에 다른 표현을 쓰더라도, 그 문서가 현저한 사실로 다루어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남는다.

그리고 한 쟁점에서의 입증 실패가 그 쟁점을 넘어 다른 주장까지 저절로 무너뜨리는 것은 아니다. 위 판결이 확정판결의 이유 중 사실관계를 현저한 사실로 보지 않으면서, 그 판결의 존재를 넘어선 파급을 끊은 것과 같은 취지에서, 이 사례에서도 각 문서가 계약의 어떤 버전에 관한 것인지, 변경 합의에 권한이 누구에게 있었는지, 손해액의 기준 시점이 언제인지가 각각 가려져야 한다. 어느 한 항목에서 증명이 부족하다는 점은 다른 항목에까지 자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결국 자료가 모여 있다는 사실이 곧 법적 평가를 뜻하지 않는다는 앞선 확인은, 입증 실패의 범위에 이르러 더욱 분명해진다. 판결의 이유에 적힌 사실관계를 현저한 사실로 끌어들이지 않고, 제출되지 않았거나 주장되지 않은 사정을 법원이 이미 아는 것으로 처리하지 않으며, 한 쟁점의 입증 부족을 나머지 쟁점까지 확대하지 않는 태도가 요구된다.

다룬 법령

다룬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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