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보이지 않는 사실과 한정된 범위의 주장을 검증 가능한 명제로 바꾸는 기준을 묻는다. 부존재 주장의 명제화와 모르는 상태의 부존재, 범위와 기간을 한정한 명제 작성, 가치판단과 검증의 경계를 차례로 살핀다. 미정 항목을 명제에 배치하는 방법과 증거 연결을 여는 명제를 다룬다.
2.1부존재 주장의 명제화
앞 단위에서 명제를 표에 옮겨 두는 데서 그치자, 남은 과제는 적극적 주장의 반대편에 선 문장, 즉 어떤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어떻게 검증 대상으로 만드는지 살피는 일이었다. 상대측이 세 이메일을 세 번의 별도 합의로 본다면, 우리 측의 방어 논리는 곧 합의가 세 번 성립하지 않았다는 부정문이 된다. 그런데 부정문은 그 자체로 무엇을 언제 어디까지 부정하는지 밝히지 않으므로, 먼저 부정의 범위를 한정하고 그 범위 안에서 무엇이 확인되지 않았는지를 문장으로 세워야 한다.
소극적 사실을 증명의 대상으로 삼는 데에는 민사소송법 제288조가 놓여 있는 자리가 중요하다. 그 조문은 "법원에서 당사자가 자백한 사실과 현저한 사실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아니한다. 다만, 진실에 어긋나는 자백은 그것이 착오로 말미암은 것임을 증명한 때에는 취소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민사소송법 제288조). 여기서 증명이 면제되는 사실의 범위가 자백 사실과 현저한 사실로 정해져 있다는 점은, 부존재에 관한 주장을 그 자리에 그대로 놓을 수 없음을 말한다. 합의의 부존재는 당사자가 자백한 사실도 아니고 현저한 사실도 아니므로, 검증 절차를 거쳐야 할 대상으로 남는다.
이 장면에서 부존재 주장을 명제로 바꾸는 작업은 세 단계를 거친다. 첫째, 부정의 범위를 한정한다. 세 이메일이 각각 별도의 합의를 이루었다는 상대측 주장을 그대로 놓고, 우리가 부정하는 것은 합의의 총계가 셋이라는 점인지, 아니면 첫 이메일 이후의 어떤 이메일이 독립된 약정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인지 나누어 적는다. 둘째, 그 범위 안에서 무엇이 확인되는지를 긍정문으로 옮긴다. 세 이메일이 같은 발신 계정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자료가 보여 주는 대목이며, 그 이메일들의 문안이 반복 발송된 것이었다는 점이 우리 측의 해석에 부합한다는 대목은 검증 대상으로서의 명제에 놓이지 그 자체의 결론이 되지는 않는다. 셋째, 미정인 사항을 그대로 남긴다. 변경 합의의 성립 시점과 발신 계정의 권한 범위가 미정이므로, 명제는 그 요소들의 값을 특정하지 않은 채 미정으로 남기는 한편, 부정의 범위를 좁히는 데 필요한 전제를 조건의 형태로 덧붙인다. 그런데 조건의 표현을 그대로 옮길 때에는 민사소송법 제288조의 단서가 보여 주듯, 그 조건이 증명의 대상에서 빠지지 않도록 다루어야 한다. 가령 대법원 2011. 5. 13. 선고 2009다75291 판결의 판시사항 [4]는 "채무자가 지급 정지 전 60일 이내에 한 변제 등 채무 소멸에 관한 행위로서 그 시기가 채무자의 의무에 속하지 않는 행위가 다른 회생채권자 등과의 평등을 해하지 아니하여 부인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경우"를 다루는데, 부정의 범위를 정할 때 예외의 요건을 인용에서 빼놓지 않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런 구분이 왜 필요한지는 대법원 2011. 5. 13. 선고 2009다75291 판결의 판시사항 [1]이 보여 주는 모양새와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그 판시사항은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제100조 제1항 제1호에서 정한 부인대상 행위 당시 수익자가 다른 회생채권자 등을 해하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는지에 대한 증명책임 소재(=수익자)"를 다룬다(대법원 2011. 5. 13. 선고 2009다75291 판결). 여기에서 알지 못하였는지가 곧 부지의 부존재이며, 그 판결은 그 부존재에 대한 증명책임을 수익자에게 두었다. 부존재의 검증 대상이 무엇인지, 그에 대한 증명책임을 누가 짊어지는지가 한 문장 안에서 함께 정해지는 셈이다. 우리가 세 이메일에 대해 주장하는 부존재도 이와 같은 이중의 지정을 요구한다. 부정의 대상과 그 부정에 대한 증명책임의 소재를 각각 밝혀야 비로소 검증 절차가 열린다.
그리고 자료가 제공되었다는 사실을 법적 평가로 곧바로 옮길 수는 없다는 점을 전제로 삼아야 한다. 지급 기록의 금액이 한 이메일의 기재액과 같다는 점은 그 자체로 해당 이메일이 합의를 이루었다는 뜻이 아니고, 계산서가 그 금액을 손해액 계산의 출발값으로 삼았다는 점도 그 이메일의 법적 효력을 확인해 주지 않는다. 같은 금액이 기재되었다는 사실은 다만 명제의 한 요소일 뿐이며, 그 요소가 어느 명제에 놓이는지는 미정으로 남는다. 부존재 주장을 명제로 만드는 일은 결국 이 요소들을 빠짐없이 배열하고, 미정인 값은 미정으로 남긴 채, 부정의 범위를 좁혀 가는 일이라 하겠다.
2.2모르는 상태의 부존재
앞 단위에서 소극적 사실을 검증 가능한 명제로 바꾸는 작업을 끝냈다면, 이제는 그러한 명제 안에 놓인 모르는 상태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물어야 한다.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제100조 제1항 제1호의 해석에 관한 대법원 2011. 5. 13. 선고 2009다75291 판결은 그 물음에 직접 답한다. 수익자가 다른 회생채권자 등을 해하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는지를 두고 대법원은 그 사실관계의 부존재를 누가 증명하는지 밝히면서, "이때 각 행위로 인하여 이익을 받은 자(이하 ‘수익자’라 한다)가 행위 당시 회생채권자 등을 해하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경우에는 그 행위를 부인할 수 없으나, 그와 같은 수익자의 악의는 추정되므로, 수익자 자신이 선의에 대한 증명책임을 부담한다"[1]고 판시한다. 아는 상태가 추정된다는 말은, 모르는 상태가 곧 주장자가 따로 밝혀야 하는 항변의 요건임을 뜻한다.
같은 판결은 제100조 제1항 제3호의 채권자에 관해서도 같은 구조를 따른다. 채권자가 평등을 해하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 역시 선의의 증명으로 넘어와야 하므로, "채권자는 채무자가 행위 당시 다른 회생채권자 등과의 평등을 해하게 되는 것을 알았다고 추정되므로, 채권자 자신이 선의에 대한 증명책임을 부담한다"[6]고 판시된다. 따라서 모르는 상태의 부존재는 추정의 깨짐에 관한 문제이고, 그 깨짐에 필요한 증거를 마련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먼저 결정된다. 부인권의 원인이 충분히 밝혀졌을 때에만 이 문제가 생긴다는 점도 이 판결의 사안 구성에서 확인된다.
그렇다면 합성된 장면에서 세 이메일을 같은 문안이 반복 발송된 것으로 볼지, 별도의 합의 세 건으로 볼지는 이러한 증명책임 소재와 무관하게 논의되어서는 안 된다. 발신 계정의 권한 범위와 변경 합의의 성립 시점은 미정이고, 지급 기록이 어느 거래에 관한 것인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대법원 2011. 5. 13. 선고 2009다75291 판결이 정한 것은 수익자 또는 채권자가 선의임을 입증해야 한다는 소재의 배분이다. 이 판결에 따르지 않고 새로 요건을 만들어 넣으면, 모름의 상태를 별도의 증명 대상으로 삼아 버리는 오류에 빠진다.
전득자의 경우에 관하여도 같은 판결이 방향을 제시한다. 관리인이 전득자에게 부인권을 행사하려면 전득자가 앞 전득자에 대해 부인의 원인이 있음을 알았다는 점이 요구되는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러한 전득자의 악의에 대한 증명책임은 전득자에 대한 부인권을 행사하는 관리인에게 있다"[2]고 판시한다. 요건의 내용이 달라지면 증명책임의 소재도 따라 바뀐다. 이 예에서 계산서가 쓴 기준 시점과 대안 상황이 미정이라는 점은 요건의 새로이 조성되는 부분이 아니라, 전득자 악의의 입증에 필요한 사실로만 취급된다.
결국 모르는 상태의 부존재는 별도의 신설 요건이 아니라, 추정을 뒤집는 한정된 입증 과제로 놓인다. 판시사항이 정한 증명책임 소재를 넘겨 새 요건을 만들지 않는 한, 세 이메일과 지급 기록, 계산서가 서로 맞물려 무엇을 증명하는지는 각 증거의 증명 대상과 증명책임의 소재에 따라 정리된다. 그 범위와 시점을 한정하여 검증하는 문제는 다음 논의로 넘어간다.
2.3범위와 기간 한정 명제
부지의 부존재가 검증 대상이 되는 방식을 확인한 데 이어, 다음 질문은 명제의 범위를 어디까지 잡아야 하는지이다. 상대방은 같은 달에 작성된 변경 이메일 세 건을 세 번의 별도 합의로 제시하고, 우리 측은 같은 문안이 반복 발송된 것으로 본다. 주장이 갈리는 지점은 합의의 성립 시점과 범위이며, 여기서 검증 대상으로 삼을 사실을 시점과 범위로 한정해 적는 법을 살펴본다.
검증 대상의 한정에 관한 기준을 보여 주는 판례가 있다. 대법원 2011. 4. 28. 선고 2010도14487 판결은 형사재판에서의 증명 대상이 공소장에 특정된 범죄사실 전체임을 밝히면서, 특히 일시를 방어권의 주된 대상으로 꼽는다. 그 판결은 "위와 같은 엄격한 증명의 대상에는 검사가 공소장에 기재한 구체적 범죄사실이 모두 포함되고, 특히 공소사실에 특정된 범죄의 일시는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의 주된 대상이 되므로 엄격한 증명을 통해 그 특정한 대로 범죄사실이 인정되어야 하며, 그러한 증명이 부족한데도 다른 시기에 범행을 하였을 개연성이 있다는 이유로 범죄사실에 대한 증명이 있다고 인정하여서는 아니된다"고 말했다(대법원 2011. 4. 28. 선고 2010도14487 판결). 특정된 시점에 관한 증명이 없다면, 그 부근에 관련 행위가 있었을 것이라는 개연성만으로 해당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판시를 변경 이메일의 장면에 옮겨 보면, 상대방이 합의 성립으로 삼는 시점은 각 이메일이 작성된 날이 된다. 그 세 날이 각각 별도의 합의였는지, 아니면 같은 문안의 반복 발송이었는지는 먼저 범위를 적어 잡고 난 뒤에야 검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측이 변경 합의가 성립하지 않았다는 한 줄로 대응한다면, 성립 시점을 두루뭉술하게 두어 상대방 측 주장과 어긋나지 않는 구간에서 질문이 새어 나갈 수 있다. 대신 20××년 ×월 ×일 작성된 세 건의 이메일은 각각 별도의 합의가 아니라 같은 문안의 반복 발송이므로 그 세 날에 변경 합의는 성립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기간과 대상을 함께 한정해 적어야 한다. 판결이 일시를 방어권의 주된 대상으로 지목한 까닭도 같은 이치에 닿아 있다.
범위 한정의 실익은 방어의 방향을 가르는 데서 드러난다. 상대방은 자금 지급 기록의 액수가 이메일 하나에 기재된 금액과 같다는 점을, 계산서는 그 금액을 손해액 계산의 출발값으로 삼는다는 점을 함께 제시한다. 이 자료들이 증명하는 것은 지급 기록에 적힌 액수가 하나의 이메일에 적힌 액수와 수치상 같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어느 거래에 관한 기록인지는 아직 미정이다. 우리 측이 지급 기록은 이 거래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한정해 적으면, 검증은 그 기록이 어느 거래에 관한 것인가라는 좁은 질문으로 모인다. 범위를 한정하지 않고 지급 기록은 문제되지 않는다고만 대응하면, 어느 거래의 기록인지 가리는 작업이 빠진 채 논의가 이어진다.
같은 원리가 계산서에도 적용된다. 계산서는 특정 금액을 손해액 계산의 출발값으로 삼고 있으므로, 우리 측이 그 금액은 손해액 계산의 출발값이 되지 않는다고 기준 시점을 한정해 적으면, 계산서가 쓴 기준 시점과 대안 상황이 무엇인지가 곧 쟁점이 된다. 그런데 기준 시점과 대안 상황은 미정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 자료에 적힌 금액의 수치적 일치와, 그 금액이 어떤 법적 의미를 갖는가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범위를 적을 때 사실관계의 문장에 법적 평가를 섞지 않아야, 남은 쟁점이 어디인지가 드러난다.
결국 시점과 범위를 한정해 쓰는 명제는 세 가지를 담는다. 어느 기간에, 어느 대상에 관한 사실인지, 그리고 그 사실이 무엇이었는지를 한 문장에 모으는 일이다. 이 장면에서 20××년 ×월 ×일 작성된 세 건의 이메일에 관하여, 자금 지급 기록이 기록한 금액에 관하여, 계산서가 손해액 계산의 출발값으로 삼은 금액에 관하여와 같이 범위를 밝혀 두면, 검증할 질문이 무엇인지가 문서 밖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가려진 명제를 밝히는 작업이 결국 범위를 적어 잡는 일과 맞닿아 있는 까닭이 여기 있다.
2.4가치판단과 검증의 경계
범위와 기간을 한정한 명제를 세우고 나면, 이제 그 명제 안의 서술이 어느 쪽에 놓이는지를 가려야 한다. 합성 사례에서 상대측은 세 건의 변경 이메일을 세 번의 별도 합의로 읽고, 우리 측은 같은 문안이 반복 발송된 것으로 읽는다. 이 대립을 풀려면 먼저 어떤 서술이 사실로 다툴 수 있는 것이고 어떤 서술이 그 사실에 대한 평가인지 나누어야 한다. 자료가 있다는 사실이 곧 법적 평가가 아니라는 전제는 바로 이 구분에서 출발한다.
검증이 필요 없는 사실을 규정한 민사소송법 제288조는 그 경계의 한쪽 끝을 보인다. 민사소송법 제288조(불요증사실)는 "법원에서 당사자가 자백한 사실과 현저한 사실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아니한다. 다만, 진실에 어긋나는 자백은 그것이 착오로 말미암은 것임을 증명한 때에는 취소할 수 있다."라고 정한다. 자백과 현저한 사실은 증명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되지만, 단서는 자백의 취소 사유를 착오의 증명으로 한정해 둔다. 이 단서를 잃으면 자백의 효력을 다루는 판단이 검증의 영역 밖으로 흘러나간다.
같은 대립이 형사재판에서 어떤 모습으로 닿는지는 대법원 2011. 4. 28. 선고 2010도14487 판결의 판시사항 [2]와 [3]에서 확인된다. 판시사항 [2]는 금품수수 여부가 쟁점인 사건에서 금품공여자의 진술만으로 유죄를 인정하기 위한 요건을 다루고, 판시사항 [3]은 공여자와 수수자의 진술이 부분적으로 허위나 과장·왜곡·착오를 담을 때 신빙성을 판단할 때 살필 사항을 다룬다. 이 판시사항들은 진술의 신빙성 판단이 어떤 항목을 따라야 하는지를 열거할 뿐이다. 그 결론을 이 사례의 이메일에 그대로 옮길 근거는 여기에 없다.
진술이 검증 가능한 사실 주장을 담고 있는지, 아니면 그 사실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는지 가르는 자세한 기준 역시 이 판결의 문장에서 찾을 수 없다. 판시사항 [3]이 말하는 "허위·과장·왜곡·착오를 배제한 진실"은 진술의 내용을 나눌 작업을 전제로 하지만, 그 나눔의 준거를 새로 정해 주지는 않는다. 이메일의 발신 계정이 같은 것은 검증 대상의 사실이고, 그 같은 계정이 곧 같은 당사자의 의사를 뜻한다는 읽기는 그 사실 위에 얹힌 판단이다. 지급 기록의 금액이 한 이메일의 액수와 같은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의 영역에 있고, 그 금액이 곧 그 거래에 관한 것이라는 결론은 별도의 판단을 요구한다.
전문가 계산서가 쓴 기준 시점과 대안 상황은 그 자체로 미정으로 남아 있고, 자료가 제공되지 않았다. 미정 항목에 정해진 값을 끼워 넣지 않는 한, 검증할 사실과 가치판단을 가르는 작업은 이 항목들을 앞에 두고 멈춘다. 검증의 경계는 이 구분을 밝힌 자리에서 끝난다.
2.5미정 항목의 명제 배치
가치판단과 검증의 경계를 가르는 기준을 세운 뒤에 남는 일은, 미정 항목을 정해진 사실로 메우지 않고 명제의 자리에 그대로 두는 일이다. 상대측은 계약 해지와 손해 배상을 함께 청구하면서 변경 이메일 세 건과 자금 지급 기록 한 건, 전문가 계산서 하나를 냈다. 같은 발신 계정에서 나온 세 이메일, 그중 한 이메일의 액수와 같은 지급 기록, 그 금액을 손해액 계산의 출발값으로 삼은 계산서가 한 장면에 놓여 있다. 우리 측은 세 이메일을 같은 문안의 반복 발송으로, 상대측은 세 번의 별도 합의로 읽는다. 변경 합의의 성립 시점, 발신 계정의 권한 범위, 지급 기록이 어느 거래에 관한 것인지, 계산서가 쓴 기준 시점과 대안 상황은 미정이다. 이 장면에서 미정 항목은 결여가 아니라, 각각의 자리에 놓일 명제의 범위를 한정하는 표지로 둔다.
합의의 성립 시점은 무엇을 언제라 주장하는지 적는 칸이다. 형사재판에서 일시의 특정이 방어의 핵심임을 밝힌 대법원 2011. 4. 28. 선고 2010도14487 판결은 "공소사실에 특정된 범죄의 일시는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의 주된 대상이 되므로 엄격한 증명을 통해 그 특정한 대로 범죄사실이 인정되어야 하며, 그러한 증명이 부족한데도 다른 시기에 범행을 하였을 개연성이 있다는 이유로 범죄사실에 대한 증명이 있다고 인정하여서는 아니된다"고 하였다. 이 말은 형사사건의 범죄 일시를 다룬 것이지만, 여기서는 성립 시점을 적는 방식을 빌리는 데 그친다. 다만 형사의 엄격한 증명이나 증거 능력을 이 계약 분쟁에 옮겨 적용하는 것은 이 범위에서 다루지 않으므로, 성립 시점을 확정된 사실처럼 쓰지 않고 상대측의 주장 범위와 우리 측의 읽는 범위를 함께 적는 형식으로, 미정의 자리 자체를 남긴다.
발신 계정의 권한 범위와 지급 기록의 귀속도 같은 방식으로 둔다. 민사소송법 제288조는 "법원에서 당사자가 자백한 사실과 현저한 사실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아니한다. 다만, 진실에 어긋나는 자백은 그것이 착오로 말미암은 것임을 증명한 때에는 취소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민사소송법 제288조). 자백과 현저한 사실의 영역을 정한 조문이지만, 미정 항목을 판단으로 채우는 자리를 열어두지 않는 점에서 시사점이 있다. 대화자가 계정의 권한 범위와 지급 기록의 대상 거래를 마치 자백된 것처럼 다룬다면, 그 판단은 미정 표지 바깥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대법원 2011. 4. 28. 선고 2010도14487 판결은 진술의 취사선택이 나올 위험을 이렇게 지적한다: "이러한 노력 없이 금품공여자의 진술 중 일부 진술에 신빙성이 인정된다고 하여 그가 한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진술은 모두 신빙하고 이와 배치되는 피고인의 주장은 전적으로 배척한다면, 이는 피고인의 진술에 일부 신빙성이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하여 공소사실을 부인하는 피고인의 주장 전부를 신빙할 수 있다고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논리의 비약에 지나지 않아서 그에 따른 결론이 건전한 논증에 기초하였다고 수긍하기 어렵다". 그 판결이 논리의 비약이라 본 선택적 신빙의 구조는, 지급 금액과 한 이메일의 액수가 같다는 사실에서 곧바로 그 지급이 그 합의에 관한 것이라는 판단으로 넘어가는 경우를 경계하는 데 그대로 쓰인다. 민사소송법 제288조가 "진실에 어긋나는 자백은 그것이 착오로 말미암은 것임을 증명한 때에는 취소할 수 있다"고 단서를 둔 것은, 자백의 자리에 놓인 판단도 착오의 여지를 닫지 않는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전문가 계산서가 쓴 기준 시점과 대안 상황도 미정 항목으로 남는다. 위 판결은 증명의 정도에 관해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엄격한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고 하였고(대법원 2011. 4. 28. 선고 2010도14487 판결), 이는 미정 항목이 판단으로 채워지는 자리를 막아 주는 데 한정해 읽는다. 대법원 2011. 5. 13. 선고 2009다75291 판결이 밝힌 증명책임의 배치는, 어떤 주장의 방어가 미정 표지에 얹혀 있는지를 가르는 이정표다. 그 판결은 수익자와 관리인, 채권자에게 각각 "수익자 자신이 선의에 대한 증명책임을 부담한다"(대법원 2011. 5. 13. 선고 2009다75291 판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러한 전득자의 악의에 대한 증명책임은 전득자에 대한 부인권을 행사하는 관리인에게 있다"(대법원 2011. 5. 13. 선고 2009다75291 판결), "채권자 자신이 선의에 대한 증명책임을 부담한다"(대법원 2011. 5. 13. 선고 2009다75291 판결)고 배정한다. 이 사례에서 그 배치를 계약 분쟁의 책임 구조에 옮기지는 않는다. 다만 상대측이 계산서의 기준 시점과 대안 상황을 확정된 사실로 주장한다면, 그 확정의 근거가 어느 주장에 놓여 있는지는 이 판결이 밝힌 증명책임의 표지로 대조해 볼 뿐이다.
미정 항목의 명제는 확정의 문장이 아니라 범위의 문장으로 끝맺는다. 대법원 2011. 5. 13. 선고 2009다75291 판결은 부인의 대상이 되는 행위가 유해하다 하더라도 예외가 있음을 전제로, "행위의 상당성 유무는 행위 당시 회생회사의 재산 및 영업 상태, 행위의 목적·의도와 동기 등 회생회사의 주관적 상태를 고려함은 물론, 변제행위에서는 변제자금의 원천, 회생회사와 채권자의 관계, 채권자가 회생회사와 통모하거나 회생회사에 변제를 강요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하였는지 등을 기준으로 하여 신의칙과 공평의 이념에 비추어 구체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 판단 기준은 회생 사안의 것이므로 여기에 옮기지 않는다. 다만 미정 항목을 명제로 쓸 때 무엇을 무엇의 기준으로 삼는지 적는 자리가 따로 있다는 점을, 그 문장의 배치에서 확인한다. 성립 시점의 명제, 권한 범위의 명제, 지급 기록 귀속의 명제, 계산서 기준의 명제는 각각의 미정 표지를 문장 끝에 남긴 채 제자리를 지킨다. 미정 항목에 정해진 사실을 끼워 넣지 않았으므로, 앞 단위가 그어 놓은 검증의 경계가 이 명제들 위에 그대로 유지된다.
2.6증거 연결을 여는 명제
한정된 범위의 명제가 자리를 잡은 뒤 무엇이 남는지를 살펴본다. 민사소송법 제288조는 "법원에서 당사자가 자백한 사실과 현저한 사실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아니한다. 다만, 진실에 어긋나는 자백은 그것이 착오로 말미암은 것임을 증명한 때에는 취소할 수 있다."라고 정한다. 이 조문은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 사실을 둘로 나누고, 자백의 취소 요건을 단서로 둔다. 이 사례에서 상대방의 청구와 우리 측의 반박 사이에 자백에 해당하는 주장이 있는지, 현저한 사실로 자리할 항목이 있는지는 이 시점에서 정해져 있지 않다.
현저한 사실로 놓일 항목은 이 사례에서 먼저 찾기 어렵다. 변경 이메일 세 건이 같은 달에 작성된 점, 세 건 모두 같은 발신 계정에서 나온 점, 지급 기록의 금액이 그중 한 이메일에 기재된 액수와 같은 점, 계산서가 그 금액을 손해액 계산의 출발값으로 삼는 점은 제출된 자료가 보여주는 사실이다. 그러나 변경 합의의 성립 시점, 발신 계정의 권한 범위, 지급 기록이 어느 거래에 관한 것인지, 계산서가 쓴 기준 시점과 대안 상황은 미정으로 남는다. 미정 항목에 정해진 사실을 끼워 넣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명제가 자리를 잡는다.
변경 이메일 세 건을 둘러싼 대립은 이 사례의 첫 번째 쟁점이다. 우리 측은 세 이메일을 같은 문안이 반복 발송된 것으로 보고 있고, 상대측은 세 번의 별도 합의로 본다. 대법원 2011. 4. 28. 선고 2010도14487 판결은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할 때 고려할 사항을 밝히면서 "금품수수 여부가 쟁점이 된 사건에서 금품공여자나 금품수수자로 지목된 피고인의 진술이 각기 일부는 진실을, 일부는 허위나 과장·왜곡·착오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으므로, 형사재판을 담당하는 사실심 법관으로서는 금품공여자와 피고인 사이의 상반되고 모순되는 진술들 가운데 허위·과장·왜곡·착오를 배제한 진실을 찾아내고 그 진실들을 조합하여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라고 설시한다. 세 이메일의 발신 계정이 같다는 점 하나로 반복 발송과 별도 합의 가운데 어느 쪽인지 정해지지 않는다면, 그 구분은 이 명제 안에서 열려 있어야 한다.
지급 기록과 전문가 계산서는 이 사례의 두 번째 쟁점으로 놓인다. 같은 판결은 객관적 물증의 유무가 미치는 효과를 다음 문장에서 밝힌다. "금품수수 여부가 쟁점이 된 사건에서 금품수수자로 지목된 피고인이 수수사실을 부인하고 있고 이를 뒷받침할 금융자료 등 객관적 물증이 없는 경우 금품을 제공하였다는 사람의 진술만으로 유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 진술이 증거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만한 신빙성이 있어야 하고"라고 설시한 것이 그것이다. 지급 기록은 객관적 자료이지만 그 금액이 어느 거래에 관한 것인지 미정인 범위에서, 계산서의 출발값과 같은 금액이라는 사정이 곧 두 자료의 연결을 확정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판결은 선택적 채택의 위험을 다음 문장에서 지적한다. "공소사실에 기재된 금품제공의 일시, 방법, 금액 등 전부에 관한 합리적 의심이 모두 배제되었다고 보기 어려운데도, 금품공여자들의 진술 중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부분만 선택적으로 믿고 이에 배치되는 피고인의 주장을 모두 배척함으로써 위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한 원심판결에 증명의 정도에 관한 법리오해 또는 논리와 경험법칙을 위반하여 합리적인 자유심증의 범위와 한계를 넘어서 사실을 인정한 위법이 있다고 한 사례."라고 설시한다. 이 사례에서 세 이메일 가운데 하나의 액수만 골라 지급 기록과 계산서를 잇고 나머지 이메일을 반복 발송으로 넘긴다면, 그 연결 방식은 이 지적의 범위 안에서 다시 묻는다.
이 사례의 명제 배치는 한정된 범위를 넘지 않는다. 자료가 있다는 사실이 곧 법적 평가가 아니라는 전제 아래, 같은 발신 계정·같은 금액·같은 출발값이라는 겉보기의 연결은 이 자리에서 열린 채로 남는다. 증거 연결을 평가할 기준은 이 자리에서 먼저 세우지 않고, 직접·간접·출처·연결의 문제는 그 문제를 다룰 차례로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