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연구 글에서 사건번호와 이름을 표기하는 문제를 두고, 판결에 쓴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방식과 판결에 없는 항목을 조합해 새로 식별하게 만드는 표기를 나누어 정리한다. 2014다235080의 기준에 맞추어 학문적 표현에 닿는 표기의 경계를 살피되, 표기 방식이 법률사무의 취급에 해당하는지는 다음 장에서 본다.
10.1사건번호와 이름의 표기 문제
제9장은 공개된 정보와 새 식별 정보의 구분을 남겨 둔 채 끝났고, 그 자리는 곧 이름과 번호를 어떻게 옮길지의 문제로 넘어온다. 연구자가 사건번호와 기업명을 나란히 적어 둔 글을 두고 삭제 요구와 질문이 이어진 까닭은, 두 표기가 글 안에서 각각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표기의 대상이 판결문에 적힌 항목인지, 연구자가 새로 붙인 호칭인지에 따라 옮기는 범위와 새로 만드는 범위가 갈린다. 이 글에서 사건번호와 이름의 표기가 놓이는 자리를 나눠 두면, 뒤에 이어질 옮김의 방식을 논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지가 분명해진다.
대법원 2016. 8. 17. 선고 2014다235080 판결은 공개된 정보의 범위를 적시하며 그 정보의 성격부터 밝혔다. 판결은 개인정보에 대해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의 보호대상이 되는 개인정보는 개인의 신체, 신념, 사회적 지위, 신분 등과 같이 개인의 인격주체성을 특징짓는 사항으로서 개인의 동일성을 식별할 수 있게 하는 일체의 정보이고, 반드시 개인의 내밀한 영역에 속하는 정보에 국한되지 아니하며 공적 생활에서 형성되었거나 이미 공개된 개인정보까지 포함한다"고 말했다. 이 판결에서 다루인 정보는 사진과 성명, 출생연도, 직업, 직장, 학력, 경력이었다. 판결이 나열한 항목은 그 자체로 특정인을 가리키며, 연구자가 판결에서 그대로 옮긴 사건번호와 기업명 역시 같은 자리에 놓인다.
다만 판결이 덧붙인 한계는 표기의 뜻을 그 자리에서 끝내지 않음을 알려 준다. 이 판결은 동의의 범위에 관해 "그리고 정보주체의 동의가 있었다고 인정되는 범위 내인지는 공개된 개인정보의 성격, 공개의 형태와 대상 범위, 그로부터 추단되는 정보주체의 공개 의도 내지 목적뿐만 아니라, 정보처리자의 정보제공 등 처리의 형태와 정보제공으로 공개의 대상 범위가 원래의 것과 달라졌는지, 정보제공이 정보주체의 원래의 공개 목적과 상당한 관련성이 있는지 등을 검토하여 객관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고 밝혔다. 표기가 가리키는 범위가 원래 공개된 범위와 달라졌는지는 이 글에서 기업명의 표기 범위와 분석의 재현 가능성과 함께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표기를 옮긴 일이 곧 새 범위를 연 것인지를 미리 단정하지 않는 편이 이 판결의 취지에 부합한다.
한편 연구자가 양형이 일관되지 않다고 적은 문장이 무엇을 담은 것인지도 표기와 떼어 놓을 수 없다. 대법원 2023. 10. 26. 선고 2017도18697 판결은 학문적 표현을 사실의 적시로 다루는 데 신중해야 함을 전제로, "학문적 표현을 그 자체로 이해하지 않고, 표현에 숨겨진 배경이나 배후를 섣불리 단정하는 방법으로 암시에 의한 사실 적시를 인정하는 것은 허용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판결이 이름과 사건번호를 나열한 글 자체를 두고 한 결론은 아니며, 다만 학문적 표현을 평가할 때 문장 밖의 배경을 덧붙여 읽지 말 것을 요구한다. 기업명과 사건번호가 나란히 놓인 글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글의 표현에서 읽는 한, 연구자가 적지 않은 동기나 빠진 사실을 표기의 뜻으로 보충하는 일은 남는다.
따라서 이 글에서 사건번호와 이름의 표기는 두 자리를 함께 차지한다. 판결문에 적힌 항목을 옮기는 자리와, 연구자가 새로 붙인 호칭이나 서술을 두는 자리가 구분되어야 한다. 삭제 요구와 단체의 질문이 이 글에 끼친 영향과 기업명 표기의 범위는 미정으로 남는다. 표기가 무엇을 옮기고 무엇을 새로 만들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명예훼손의 성립이나 법률사무의 취급이라는 평가를 이 자리에서 내리지 않는다. 표기의 자리를 나눠 둔 데서 이 장은 나아가, 판결에 쓰인 표기를 어떻게 옮길지의 방식을 살핀다.
10.2판결 표기 그대로 옮기기
그 표기가 무엇을 옮기고 무엇을 지어내는지 가르려면, 옮길 대상인 판결의 말부터 펼쳐 놓는 수밖에 없다. 대법원 2016. 8. 17. 선고 2014다235080 판결은 판시사항에서 그 글에 쓰이는 표기를 이렇게 정한다. "정보주체가 직접 또는 제3자를 통하여 이미 공개한 개인정보는 공개 당시 정보주체가 자신의 개인정보에 대한 수집이나 제3자 제공 등의 처리에 대하여 일정한 범위 내에서 동의를 하였다고 할 것이다."(대법원 2016. 8. 17. 선고 2014다235080 판결) 판결이 쓰는 말이 곧 그 판결의 표기다. 베끼는 일은 이 표기를 손대지 않고 옮기는 일에서 시작한다.
그 판결이 당사자를 지목하는 방식도 그대로 두어야 한다. 판시사항은 당사자를 이렇게 부른다. "법률정보 제공 사이트를 운영하는 갑 주식회사가 공립대학교인 을 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병의 사진, 성명, 성별, 출생연도, 직업, 직장, 학력, 경력 등의 개인정보를 위 법학과 홈페이지 등을 통해 수집하여 위 사이트 내 ‘법조인’ 항목에서 유료로 제공한 사안에서"(대법원 2016. 8. 17. 선고 2014다235080 판결) 갑, 을, 병이라는 표기가 판결이 고른 방식이다. 여기에 판결에 없는 별칭을 붙이거나 판결의 분류 항목을 호칭처럼 쓰면, 판결의 표기에서 새로 만든 표기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판결의 말을 통째로 옮길 때에는 생략의 자리도 판결이 둔 대로 남긴다. 판시사항은 그 표기 아래 남은 범위를 이렇게 적는다. "이와 같이 공개된 개인정보를 객관적으로 보아 정보주체가 동의한 범위 내에서 처리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경우에도 동의의 범위가 외부에 표시되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또다시 정보주체의 별도의 동의를 받을 것을 요구한다면 이는 정보주체의 공개의사에도 부합하지 아니하거니와 정보주체나 개인정보처리자에게 무의미한 동의절차를 밟기 위한 비용만을 부담시키는 결과가 된다."(대법원 2016. 8. 17. 선고 2014다235080 판결) 앞 구를 줄이거나 단서의 자리를 옮기면, 판결이 둔 조건이 빠진 표기가 된다. 그 글이 옮기는 대상인 판결문에서 기업명을 어느 범위로 적었는지에 관한 판단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일이 무엇을 새로 만들지 않는지는 앞서 두어진 자료의 경계에서 가늠할 수 있다. 무가 30건의 판결문에서 형량과 판단 근거를 모으고 사건번호를 함께 적어 인터넷에 글을 냈으며, 그 글이 명예훼손이라며 삭제를 요구한 주체는 피고인이던 기업이다. 어떤 사건도 수임하지 않았고 대가를 받은 바도 없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명예훼손이 성립하는지, 아니면 법률사무가 취급되었는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 관찰은 그 글이 지닌 성격을 적은 것이지 법적 평가가 아니다.
그러므로 옮기는 방식이 하는 일은 좁다. 판결이 붙인 표기와 당사자 호칭, 판결이 둔 조건의 자리를 글자대로 옮겨 읽는 자리에 두는 일이다. 판결에 없는 호칭이나 별칭을 덧붙이는 순간, 그 방식은 더 이상 판결 표기를 베끼는 방식이 아니라 표기를 새로 만드는 방식이 된다. 이 경계는 옮기는 쪽의 문장이 아니라 옮길 대상인 판결의 말에서 나온다.
10.3조합 표기와 식별의 새로움
판결에서 옮긴 표기를 하나씩 그대로 적는 작업에 이어, 이제 맞물린 표기가 새로이 식별을 만들어내는지를 묻는다. 무는 판결마다 따로 실린 항목을 한 글에 모아 썼으므로, 낱개 판결의 표기와 모아 쓴 글의 표기를 구별하여 읽어야 한다. 이 구별에서 자료의 말과 이 사례의 형상을 나누어 둔다.
대법원 2016. 8. 17. 선고 2014다235080 판결은 보호 대상인 개인정보의 의미에 관해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의 보호대상이 되는 개인정보는 개인의 신체, 신념, 사회적 지위, 신분 등과 같이 개인의 인격주체성을 특징짓는 사항으로서 개인의 동일성을 식별할 수 있게 하는 일체의 정보이고, 반드시 개인의 내밀한 영역에 속하는 정보에 국한되지 아니하며 공적 생활에서 형성되었거나 이미 공개된 개인정보까지 포함한다.”고 밝혔다. 식별이 가능하게 하는 정보가 넓게 보호 대상에 든다는 이 설명은, 무의 글에서 항목들이 나란히 놓인 자리를 해석하는 데 첫 단서가 된다.
같은 판결은 수합한 항목의 모임을 전제로 판단 기준을 두었는데, 정보주체의 동의 범위를 판단하는 기준에 관하여 “공개된 개인정보의 성격, 공개의 형태와 대상 범위, 그로부터 추단되는 정보주체의 공개 의도 내지 목적뿐만 아니라, 정보처리자의 정보제공 등 처리의 형태와 정보제공으로 공개의 대상 범위가 원래의 것과 달라졌는지, 정보제공이 정보주체의 원래의 공개 목적과 상당한 관련성이 있는지 등을 검토하여 객관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무의 글은 각 판결에 실린 사건번호와 기업명을 한데 모아 양형의 흐름을 보여 주려 했으므로, 원래의 대상 범위가 이 글에서 넓어졌는지가 그 판단에 닿는다.
이 사례에서 무가 모은 것은 판결마다 이미 공개된 표기이며, 그 모아 쓴 결과가 개인의 동일성을 식별하게 만드는지의 여부는 앞서 밝힌 기준으로 살필 일로 남는다. 무는 어떤 사건도 수임하지 않았고 대가를 받은 바 없이 글을 그대로 두었으나, 표기가 결합하여 새로이 누군지 알아보게 되는지는 무의 동기가 아니라 표기의 형태와 대상 범위의 변화를 놓고 보아야 한다. 무의 글이 명예훼손이라는 삭제 요구가 접혀 있다 한들, 그 요구가 곧 표기의 범위를 정해 주는 것은 아니다.
무의 글에 쓰인 기업명 표기의 범위, 분석 방법의 재현 가능성, 삭제 요구와 고소가 연구에 준 영향은 미정으로 남는다. 이 관찰이 명예훼손의 성립이나 법률사무의 취급이라는 법적 평가가 되는 것은 아니며, 조합된 표기가 식별을 새로이 만들었는지도 이 단계에서 정해지지 않았다. 무의 글은 판결에 실린 표기를 모아 그 흐름을 보여 주려 했을 뿐이고, 그 모아 쓴 자리를 법적으로 가늠하는 일은 미정으로 두어야 한다.
10.42014다235080의 기준
표기가 새로 식별하게 하였다면, 그 표기가 담은 정보가 원래 공개된 것인지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대법원 2016. 8. 17. 선고 2014다235080 판결은 이미 공개된 개인정보를 다루면서 보호대상과 판단 기준을 함께 밝히고 있다.
먼저 그 판결은 개인정보의 범위를 넓게 보아 공개된 것도 포함한다고 하였다. 판결요지는 보호대상인 개인정보가 "개인의 신체, 신념, 사회적 지위, 신분 등과 같이 개인의 인격주체성을 특징짓는 사항으로서 개인의 동일성을 식별할 수 있게 하는 일체의 정보이고, 반드시 개인의 내밀한 영역에 속하는 정보에 국한되지 아니하며 공적 생활에서 형성되었거나 이미 공개된 개인정보까지 포함한다"고 하였다(대법원 2016. 8. 17. 선고 2014다235080 판결). 같은 판결은 조사·수집·보관·처리·이용 행위가 "모두 원칙적으로 개인정보자기결정권에 대한 제한에 해당한다"고도 하였다(대법원 2016. 8. 17. 선고 2014다235080 판결). 무가 모은 판결문에 든 성명과 사건번호도 누군가를 가려내는 정보에 닿는다.
그렇다고 공개된 정보를 옮긴 표기가 곧 위법한 것은 아니다. 그 판결요지는 이 경우 판단이 "정보주체가 공적인 존재인지, 개인정보의 공공성과 공익성, 원래 공개한 대상 범위, 개인정보 처리의 목적·절차·이용형태의 상당성과 필요성, 개인정보 처리로 침해될 수 있는 이익의 성질과 내용 등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이루어진다고 하였다(대법원 2016. 8. 17. 선고 2014다235080 판결). 아울러 "단지 정보처리자에게 영리 목적이 있었다는 사정만으로 곧바로 정보처리 행위를 위법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대법원 2016. 8. 17. 선고 2014다235080 판결). 무는 대가를 받지 않고 글을 올렸으나, 그 글에 이름과 사건번호를 함께 둔 표기가 다툼의 대상이 된다면 이 사정만으로 결론이 정해지지는 않는다.
다루어지는 정보가 공개된 것일 때 그 범위의 확인도 남는다. 그 판결요지는 "이미 공개된 개인정보를 정보주체의 동의가 있었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범위 내에서 수집·이용·제공 등 처리를 할 때는 정보주체의 별도의 동의는 불필요하다고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대법원 2016. 8. 17. 선고 2014다235080 판결). 나아가 그 범위는 "공개된 개인정보의 성격, 공개의 형태와 대상 범위, 그로부터 추단되는 정보주체의 공개 의도 내지 목적뿐만 아니라, 정보처리자의 정보제공 등 처리의 형태와 정보제공으로 공개의 대상 범위가 원래의 것과 달라졌는지, 정보제공이 정보주체의 원래의 공개 목적과 상당한 관련성이 있는지 등을 검토하여 객관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고 하였다(대법원 2016. 8. 17. 선고 2014다235080 판결). 판결문은 공적 절차의 산물이지만, 그 안에 든 이름과 번호를 한 목록에 모아 두는 표기가 원래의 공개 범위 안에 머무는지는 이 자리에서 정해지지 아니한다. 같은 표기로 새로 식별되는지 여부와 달리, 공개된 범위의 안팎은 별도로 확인할 사항이다.
끝으로 그 판결은 교수의 사진·성명 등을 모아 유료로 제공한 사안에서, 영리 목적에도 불구하고 "그에 의하여 얻을 수 있는 법적 이익이 정보처리를 막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정보주체의 인격적 법익에 비하여 우월하므로" 위법한 행위로 평가할 수 없다고 하였다(대법원 2016. 8. 17. 선고 2014다235080 판결). 이 비교형량의 틀은 판결에 기록된 그 사건의 판단이다. 무의 글을 둘러싼 다툼에서 표기의 한계를 가늠하는 작업은 이러한 기준을 참작할 뿐, 그 글이 곧 위법하다거나 적법하다는 결론을 미리 정해 두지는 않는다.
10.5학문적 표현에 닿는 표기
2014다235080 판결에서 확인한 표기의 한계에 이어, 이제 2017도18697 판결이 밝힌 학문적 표현의 범위 속에서 사건번호와 이름의 표기가 어느 자리에 놓이는지 살핀다. 이 판결은 대법원 2023. 10. 26. 선고 2017도18697 판결로서, 연구자의 글에 담긴 사건번호와 이름이 학문적 과정의 일부로 다뤄지는 조건을 밝힌다.
먼저 학문적 표현이 보호받는 범위를 대법원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대법원 2023. 10. 26. 선고 2017도18697 판결은, 학문적 표현행위가 어떤 사정이 없는 한 정당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를 묻는 자리에서 학문적 표현행위가 기본적 연구윤리를 위반하거나 해당 학문 분야에서 통상적으로 용인되는 범위를 심각하게 벗어나 학문적 과정이라고 보기 어려운 행위의 결과라거나, 논지나 맥락과 무관한 표현으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경우, 이를 학문적 연구를 위한 정당한 행위로 보아야 하는지 여부에 대해 적극적으로 판시하였다. 연구자가 확정판결 30건의 사건번호와 피고인이던 기업의 이름을 함께 적어 형량을 나열한 글이 이 범위 안에 들어오는지는, 위 문구가 요구하는 연구윤리와 맥락의 관련성을 따져 판단할 일이다.
다만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단계에도 연구자는 타인의 권리를 함께 살피어야 한다. 대법원 2023. 10. 26. 선고 2017도18697 판결은 연구자가 연구 주제의 선택, 연구의 실행뿐만 아니라 연구 결과 발표에 이르기까지 존중하여야 하는 타인의 권리를 다룬다. 확정판결에 기록된 기업의 이름을 글에 옮기는 표기 방식도 이 발표 단계의 행위에 해당하므로, 표기의 범위와 방법은 타인의 명예를 보호하는 요구와 함께 검토된다.
그럼에도 표현을 사실의 적시로 평가하는 일에는 뚜렷한 유보가 붙는다. 대법원 2023. 10. 26. 선고 2017도18697 판결은 학문적 표현을 그 자체로 이해하지 않고, 표현에 숨겨진 배경이나 배후를 섣불리 단정하는 방법으로 암시에 의한 사실 적시를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소극적으로 판시하였다. 이 글에서의 사건번호와 이름은 판결문에 적힌 표기를 옮긴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이면에 다른 뜻이 숨어 있다는 식으로 읽어 들이는 것은 이 판결이 제시하는 평가 방식에 맞지 않는다.
끝으로 증명책임의 소재가 정해져 있다. 대법원 2023. 10. 26. 선고 2017도18697 판결은 학문적 표현이 학문의 자유로서 보호되는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한 증명책임이 검사에게 있음을 밝힌다. 이 사례에서 무의 글이 학문적 표현의 범위를 벗어난다는 점은 검사가 입증하여야 할 몫으로 남는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사건번호와 이름을 판결문에 기록된 대로 적는 표기는 학문적 표현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구 결과 발표의 한 양상으로 놓인다. 이 글이 명예훼손의 성립이나 법률사무의 취급에 해당한다는 평가는 여기서 확정되지 않으며, 무가 어떤 사건도 수임하지 않았고 대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연구 행위의 성격을 가늠하는 정황으로만 머문다.
10.6표기의 경계와 다음 물음
앞 단위에서 밝힌 학문적 표현의 평가 기준을 옮겨 적은 데 이어, 이번에는 사건번호와 이름을 적는 표기의 방식 자체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무는 확정판결 30건의 사건번호와 기업명을 나란히 적어 글을 공개했고, 그 표기를 둘러싸고 두 가지 물음이 놓였다. 하나는 표기의 범위가 어디까지이고, 다른 하나는 그 표기 방식이 법률사무의 취급에 해당하는지이다. 후자의 물음은 이 자리에서 다루지 않고 뒤로 미룬다.
표기의 경계를 논하기 전에, 표기의 대상이 되는 정보가 이미 공개된 범위에 머무는지가 먼저 가려진다. 대법원 2016. 8. 17. 선고 2014다235080 판결은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의 보호대상을 넓게 보면서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의 보호대상이 되는 개인정보는 개인의 신체, 신념, 사회적 지위, 신분 등과 같이 개인의 인격주체성을 특징짓는 사항으로서 개인의 동일성을 식별할 수 있게 하는 일체의 정보이고, 반드시 개인의 내밀한 영역에 속하는 정보에 국한되지 아니하며 공적 생활에서 형성되었거나 이미 공개된 개인정보까지 포함한다."(…) 이 판시는 사건번호와 기업명처럼 이미 공적 영역에 드러난 표기라고 하여 보호 대상에서 빠지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다만 이미 공개된 정보를 다루는 경우 그 처리의 범위는 별도로 형량된다. 같은 판결은 공개된 개인정보를 처리할 때의 판단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정보주체의 동의가 있었다고 인정되는 범위 내인지는 공개된 개인정보의 성격, 공개의 형태와 대상 범위, 그로부터 추단되는 정보주체의 공개 의도 내지 목적뿐만 아니라, 정보처리자의 정보제공 등 처리의 형태와 정보제공으로 공개의 대상 범위가 원래의 것과 달라졌는지, 정보제공이 정보주체의 원래의 공개 목적과 상당한 관련성이 있는지 등을 검토하여 객관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무가 판결문에서 가져온 사건번호와 기업명이 원래 공개된 범위를 벗어나 새 대상에게 전달되었는지는 이 기준에 따라 가려질 문제이다.
한편 표기의 방식이 표현의 성격에 닿는 경우, 그 표현을 사실의 적시로 볼지는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대법원 2023. 10. 26. 선고 2017도18697 판결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학문적 표현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학문적 연구 결과 발표에 사용된 표현의 적절성은 형사 법정에서 가려지기보다 자유로운 공개토론이나 학계 내부의 동료평가 과정을 통하여 검증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건번호를 나열하고 형량의 편차를 지적한 무의 글이 학문적 연구의 결과 발표에 해당한다면, 그 표기 자체를 곧 사실의 적시로 돌리는 것은 이 태도와 맞지 않는다. 다만 이 글이 그러한 연구의 결과인지, 아니면 다른 성격의 발언인지는 별도로 밝혀져야 한다.
이 사례에서 기업명 표기의 범위, 분석 방법의 재현 가능성, 삭제 요구와 고소가 연구에 준 영향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 표기가 이미 공개된 범위 안에 머무는지, 표현이 학문적 연구의 결과인지 역시 이 자리에서 확정되지 않는다. 표기를 둘러싼 이 관찰이 명예훼손의 성립이라는 법적 평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표기의 경계에 관한 이 정리는 그 표기 방식이 법률사무의 취급에 해당하는지라는 별개의 물음을 스스로 해소하지 않는다.